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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법성게’ 제28구: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기자명 해주 스님

일체 존재가 법계의 모습이고 그 자체가 법계의 장엄이다

일체와 하나인 마음 생기가
법계 진실한 보배궁전 장엄

관행 등으로 공덕 적집
연기다라니로 법계 장엄

법계는 증분의 법성 성기세계
연기분의 진성 연기세계이다 

​​​​​​​진실한 보배궁전이란 법성처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

‘법성게’ 제28구는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이다. 무진보배 다라니로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한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일승경전인 ‘화엄경’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 보였는데, 그 그림을 ‘법계’라 이름붙이고 법성을 통해서 일승법계를 드러내고 있다. 법계는 일심(一心)을 그 체(體)로 하니 ‘화엄경’의 대의도 ‘만법을 통틀어 거두어서 일심을 밝힌다(統萬法明一心)’(화엄품목)라고 전해져 왔다. 

그러면 ‘법계’란 구체적으로 어디이며 법계를 ‘실보전(實寶殿)’이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 ‘장엄’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화엄교학에서 법계는 우주만유의 영역이니 법계의 법은 온 우주 일체존재로서 이를 삼종세간으로 나타내고 사종 또는 오종법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의상 스님은 또한 법계를 법성의 증분과 진성의 연기세계로 일단 나누어 파악하고, 법성과 진성이 둘이 아닌 구경의 자리를 증분의 법성처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이사무분별의 법계에 있어서는 사종법계에 이리무애(理理無礙)를 더한 오종법계, 삼종세간으로는 융삼세간의 무애세계를 법계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법계를 진실한 보배궁전[實寶殿]이라 한 것이다. 

‘법융기’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법성의 자리[法性處]이며, 연기분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장세계(花藏世界)의 염오를 떠난 진성[離染眞性]이다. 

이처럼 증분의 법성과 연기분의 진성세계가 다 실보전임을, 법융 스님은 각각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다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문] 만약 다라니로써 법성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라면, 증분의 처소에서 중중(重重)의 중(中)·즉(卽)과 미세 등의 뜻을 허락하는 것인가?
[답] 저 증분은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을 설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남음이나 결여됨이 없이 일체를 만족하기 때문에 인다라 등의 구경의 궁극이라야 이에 증분인 것이다.
[문]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은 어떤 것인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문이 그것이다. 화장정토(華藏淨土)는 삼승이 함께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삼승의 근기를 따라서 계(界)를 나누고 바다[海]를 여읜다. 만약 자종(自宗)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하나의 바다일 뿐이니, 세 품류가 없다.

여기서 세 품류란 계(界)·종(種)·해(海)라고 하겠으니 계는 법계, 종은 법성, 해는 해인으로 추정된다. 오직 하나의 바다일 뿐이라는 것은 일승법계가 정장정(淨藏定), 즉 해인삼매 가운데 모든 법의 모습이 단박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진기’에서는 ‘진실한 보배 궁전’을 세계해(世界海)라 하며, ‘대기’에서는 국토해라고도 하고 삼덕(三德)의 차별과라고도 하나, 구경으로 말한다면 성기과(性起果)라고 한다. 부처님의 과위(果位)가 갖추고 있는 지덕(智德)·단덕(斷德)·은덕(恩德) 등의 삼덕도 중생교화 측면으로는 차별과이니, 구경의 실보전은 법성성기과라는 것이다. 

연기다라니로 법계실보전을 장엄한다는 것은 중(中)·즉(卽)으로 끝없이 장엄하는 것이다. 일승의 다라니법은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일체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 없는 법계의 법이다. 이러한 법계장엄은 이와 이, 이와 사, 사와 사의 상즉과 상입 등의 이사인다라(理事因陀羅)를 구족하지만, 특히 별교일승의 무장애법계를 논하여 사사무애를 말하는 것이다.(원통기) 하나와 전체 등으로 사사무애의 무진연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를 마주하여 곧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음에 대한 관(觀)을 이루기 때문에 상즉하고 상입하여, 넓음과 좁음, 숨음과 나타남, 주(主)와 반(伴)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없음 등도 또한 법을 근본으로 한다. 이와 같이 법에 의거하여 관(觀)하는 까닭에 ‘관(觀)’이라고 이름한다. 관에 의거하여 행(行)을 일으키니 행(行) 또한 이와 같다.(화엄금관초)

이로 보면 사사무애의 무장애법계를 관하여 걸림없는 무애행을 하는 관행(觀行)이 연기분의 법계장엄이라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 후불탱화삼존불 1759년. 통도사 대광명전.

한편 ‘법계도주’에서는 법계실보전의 인다라망은 그림자와 형상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 장엄함을 말미암지 않고 닦아 증득함도 말미암지 않고, 본래 갖추어 있으며 본래 뚜렷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實)’이라 하며, 또한 이 실자(實字)는 움직일 수 없으니 움직이면 재앙이 생긴다고 못 박고 있다. 

인다라망은 제석천 궁전의 보배구슬망으로서 투명하고 영롱한 낱낱 보배구슬이 서로 서로를 반영하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다.[重重無盡] 법계의 낱낱 존재 역시 중중무진이니 그 자체로 장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갖추어져 있으며 여여부동한 법계실보전을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함이 없이 장엄하고 장엄하되 장엄함이 없는 것이다. 증득함이 없이 증득하고 증득하되 증득함이 없다. 달리 말하면 법계 안에서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체 법이 언제 어디에나 다함이 없어서 일체 공덕이 법성과 상응하여 무진하기 때문에 법계는 법계불이라 불리기도 한다.(화엄경문답) 신림(神琳) 스님은 법계의 본래 자리는 바로 나의 오척되는 몸이니, 이 뜻을 드러내고자 의상 스님이 모든 법계가 한 몸[全法界一身之像]임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보였다는 것이다. 

신림의 뜻은 다음과 같다. 즉 ‘일승법계도’에서 법계의 법은 증득의 대상(所證)이고 오늘의 내 마음은 증득의 주체(能證)이니, 곧 이 주체와 대상을 얻을 수 없는 곳이 ‘일(一)’이다. 수행하는 사람의 행과 지위를 ‘승(乘)’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법칙의 분제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법계(法界)’라고 한다. 법계의 법의 본래 자리는 나의 오척되는 몸이다. 이 뜻을 나타내고자 법계 전체를 한 몸의 형상으로 그린 까닭에 ‘도(圖)’라고 한다.(대기)

나의 오척되는 몸과 마음인 오척신을 의상 스님은 법성신이라 한다. 오척신이 곧 오척법성신으로서 자체불(自體佛)이다. ‘추혈문답’에서는 법계의 모든 존재가 나의 체(體)로서의 부처님 아님이 없으니, 만약 자체불을 예배할 수 있다면 예배할 바 아닌 사물이 없다고 한다. 자체불이라 함은 지금 나를 교화하시는 부처님도 나의 미래불임을 뜻한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동일제이니 삼세 모든 부처님이 바로 오척신이다. 삼세 모든 부처님이 곧 지금 이 나의 몸과 마음인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천궁의 일체 보배궁전을 포함한 온 법계 도량에서 광명으로 혹은 언설로 한량없는 법문을 펴신다. 균여 스님은 그 법문이 비록 광대하나 210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210자는 30구를 벗어나지 않고, 30구는 7자의 제목을 벗어나지 않으며, 제목 7자는 가장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법계도’라 한다고 법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大)자 등의 7자가 다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하니, ‘화엄경’과 ‘일승법계도’는 결국 마음(心)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한 글자는 체(體)도 아니고 작용[用]도 아니며, 원인[因]도 아니고 결과[果]도 아니며, 뜻[義]도 아니고 가르침[敎]도 아니다. 비록 일체가 아니나 일체가 될 수 있다. 하나의 법계의 마음은 상대가 끊어진 법이기 때문이다.(화엄금관초) 

‘청정한 법계’라는 이름 또한 안립한 것일 뿐이고 체(體)는 얻을 수 없으며(원통기) 오척신의 이 마음 역시 법성원융의 마음으로서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이다. 일체가 끊어진 증지(證智)의 지혜 마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또 일체와 하나이다. 일체와 하나인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그대로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에서 세주들이 각기 해탈한 경계만큼 부처님을 찬탄하는 세주묘엄이 법계장엄이고, 삼세간이 원융한 것이 법계장엄이다. 시성정각도 법계장엄이고, 해탈문을 열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 역시 법계장엄이다. 

이와 같이 법계는 증분의 법성 성기세계이고, 연기분의 진성 연기세계이다. 법계는 불(佛)이고, 공(空)이고, 심(心)이다. 법계는 오척신이고, 오척법성신이다. 

일체 존재가 법계의 모습이고 그 자체가 법계의 장엄이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햇살비치는 것 하나 하나가 법계장엄 아님이 없다. 더욱이 관법, 관심, 관행 등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실보전을 장엄하는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00호 / 2019년 8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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