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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유민 거사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업보 짊어진 인간 한계에 서방정토 왕생 구하다

정치적 야망과 권력욕 떠난 귀족
여산의 혜원 스님 백련결사 동행
아미타 구제 간절히 염원하고 
대승반야 추구하며 철저한 지계

여산에 정착한 뒤 35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혜원 스님이 유학자인 도연명과 도사인 육수정을 배웅하다 이야기에 몰두해 호계를 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호계삼소(虎溪三笑) 고사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사랑받은 소재다. 그림은 송나라 때 화승 석각의 ‘호계삼소도’.
여산에 정착한 뒤 35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혜원 스님이 유학자인 도연명과 도사인 육수정을 배웅하다 이야기에 몰두해 호계를 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호계삼소(虎溪三笑) 고사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사랑받은 소재다. 그림은 송나라 때 화승 석각의 ‘호계삼소도’.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 중국불교는 노장사상과 비교를 통해 불교를 파악하는 격의불교의 모습에서 진정한 의미의 불교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화북지방의 장안에서는 라집(羅什)과 승조(僧肇)가 등장하여 반야 공의 철학을 공고하게 다져갔으며, 강남지방의 성지 여산(廬山)에서는 승가와 재가가 어우러진 혜원(慧遠) 교단이 출현하여 장안불교와 교류 속에서 대승 반야의 새로운 샘물을 마시면서 수행으로 나아가는 신행결사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중국은 전란과 반정의 와중에서 극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강남지역 동진 귀족들은 청담과 은둔의 문화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관심보다 산천을 주유하며 시문과 예술, 종교, 철학적 담소를 즐겼다. 생과 사, 인간성과 삶의 의미를 묻는 청담의 조류 속에서 사찰은 청담의 마당으로 이용되었으며 청담에 능한 스님들도 배출되었다. 

여산에 머문 혜원 스님(334∼416)은 청담과 은둔을 즐기는 귀족들에게 소중한 귀의처였다. 여산은 풍광이 빼어나고 세속의 흔적을 씻어주는 적지이기도 했고 혜원은 매우 고결하고 청정한데다 뛰어난 종교적 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진의 귀족들이 하나 둘 여산의 혜원에게로 모여든다. 그 중 한 사람이 유유민(劉遺民, 354~410)이다. 유유민의 본래 이름은 유정지(劉程之)다. 그는 실력이 뛰어나고 정직했으며 효성이 극진했다. 그래서 동진의 권력자들이 그를 등용하고자 공을 들인 결과 높은 벼슬을 두 번에 걸쳐 지낸다. 

하지만 출세를 바라던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린다. 사람들을 진정 배려하고 행복으로 이끌기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쫓는 권력자들의 욕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 반정, 권모술수가 그에게는 부질없었다. 관직을 버리자 실권자는 그에게 ‘유민(遺民)’이라는 호를 주었다. 관직을 그만 두고 잃어버린 사람, 떠도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그의 삶의 지향이기도 했다. 은거한 유유민은 도연명, 주속지와 더불어 심양(潯陽)의 삼은(三隱)으로 불렸다. 

혜원 스님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종교인이요 품격 높은 사문이었다. 그는 ‘사문불경왕자론’을 지어 동진의 권력을 장악한 환현(桓玄)의 왕에게 예경하라는 요구에 조목조목 반박한다. 요지는 사문이란 세상을 뛰어 넘은 방외의 인물이기 때문에 세상 왕에게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진 주류인 불교계는 타락상이 심했다. 스님들이 행상 교역하며 사람들과 이익을 다투었다. 어떤 스님은 점을 쳐 길흉을 논했고, 또는 재산을 축적하여 필요 이상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등 백성들의 공양을 축냈다. 어쩌다 선행을 한다 해서 그가 어찌 사문이겠는가라는 통렬한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스님들을 추방하는 승려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여산 교단만은 예외였다. 오직 여산은 도와 덕이 있는 곳이니 수색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명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혜원 스님은 402년 유유민과 더불어 여산에서 백련결사 신행공동체 운동에 들어간다. 뇌차종, 주속지, 필영지, 종병, 장채민, 장계석 등 여산으로 찾아든 은둔 귀족들과 승려 등 123명이 여산 반야대정사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서원하며 결사에 들어간 것이다. 백련결사 발원문격인 입서문(立誓文)은 유유민이 썼다. 그 정도로 혜원과 유유민은 서로의 마음을 읽을 만큼 신뢰가 깊었다.

“부처님을 친견하는 모습은 서로 다르고 그 공덕도 같지 않습니다. 새벽에 기도는 같이 한다 해도 저녁 때 돌아오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승과 도반의 친분으로서 진실로 마음 아파하는 점입니다. 때문에 이를 개탄하고 서로 명하여 법당에서 옷깃을 가지런히 하고, 다 함께 일심을 다스려 아주 고요하게 머물게 하여, 우리 동료들이 모두 빼어난 곳에서 노닐 것을 서원합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나와, 머리를 신계(神界)에 두는 것으로, 구름길에서 홀로 선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계곡에서 세상일 전부를 잊자는 것입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나 뒤에 오르는 사람들이 (함께) 부지런히 사유하고 단호하게 다스려 나가는 길입니다. 그런 뒤에야 큰 거동을 잘 살피고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추며, 의식이 깨달아서 새롭게 되며, 몸의 형태가 고쳐지게 되옵니다.”(‘고승전’) 

이들 결사 대중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경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수행에 매진한다. 그 수행은 산란한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모아 아미타부처님을 관상하여 그 모습을 선정 속에서 친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번뇌와 미혹은 사라진다. 이를 반주삼매(般舟三昧) 한다. 그 결과 유유민은 여러 번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결사의 과정에서 혜원과 유유민은 승조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승조에게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편지를 띄우고 그 답변까지 받는다. 그 내용이 ‘조론(肇論)’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불교에서 ‘조론’의 사상적 가치는 매우 뛰어나다. 

그 중에서 ‘반야무지론’은 백미에 속한다. 반야의 지혜는 무지(無知)의 지(知)라는 말이다. 무지라 하지만 분별적인 지를 뛰어넘는, 자신을 텅 비운 성스럽고 신령한 지혜다. 일반적인 지(知)에는 부지(不知)가 끼어 있지만, 성스러운 마음의 무지에는 부지가 자리 잡지 못한다.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사물의 실상을 통찰하고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구제하는 작용을 하면서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 반야는 마음의 청정한 모습이요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반야에 근거한 사물의 공성 또한 전 존재를 아우르는 실상이다. 공성은 법신과 연결되며 법신은 아미타불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서의 잉여를 낳는다. 승조가 바라보는 법신은 형상을 떠나 있지만 유유민의 법신은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다. 그런 의미에서 혜원 교단에는 아미타불을 관상하면서 종교적 열망으로 가득 찬다. 중국 종교인에게서 이런 모습은 거부할 수 없는 안심이기도 했다. 업보를 짊어진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절망과 아미타불의 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산의 대중들은 대승의 반야를 추구하면서 자신을 비워 아미타불의 친견을 원하고 서방정토에 왕생을 발원했을 것이라고 본다.

백련결사운동을 통해 혜원 스님과 결사 대중들은 수행자의 표상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신앙을 통한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으며, 부패한 불교를 혁신하고, 정치권력의 탄압에 맞서 불교 공동체를 지켜내는 역할을 했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00호 / 2019년 8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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