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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기해년 하안거 해제 법어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9.08.16 08:32
  • 수정 2019.08.17 01:37
  • 호수 1501
  • 댓글 0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오늘 드디어 하안거 해제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알기 위해서 깨닫기 위해서 터득하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셨지요. 자신이 알고자 하는 깨치고자 하는 얻고자 하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알고자 하는 그것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알려고 하고 무엇 때문에 애쓰고 있는지 헷갈립니다. 뚜렷이 내가 이것을 모르는구나, 그것에 초점이 잡혀야 합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흔들리면 안되겠지요.

결국,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자 하는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객이 아닙니다.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시작한 이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의 가장 처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마 천 번 만 번 생각해보셨을 겁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생각도 많이 하고, 의심을 놓치지 않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 자신이 알고자 하는 목표물은 나타나지 않고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각자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영리한 사람이 있고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애를 썼는데, 다른 생각 일체 다 던져버리고 오로지 목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왜 알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석 달이 지났으니까 이제는 살림살이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음 깨닫는 것을 나의 본래면목이라고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육신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에는 머리가 있고 몸통이 있습니다. 몸이 비틀어졌다면 바로 하면 될 것이고 병이 났다면 원인을 제거하면 건강한 몸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상관없이 몸은 서 있으면 서 있는 대로 나의 몸이고, 앉아있으면 앉아있는 대로 나의 몸이고, 일하고 있으면 일하는 대로 나의 몸입니다. 여러 가지 움직이다 보니 몸이 흐트러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손, 발, 모두 쉬어버리고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으면 움직이고 있을 때 흔들린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지가 되면 그렇게 많은 노동을 했더라도 흔적도 없이 본연을 몸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깨닫는다고 할 때, 내가 깨치고자 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입니까? 앞서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엎어져도 자빠져도 성내도 억울해도 분해도 전부 마음 아닙니까? 마음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몸도, 엎어져도 자빠져도 병이 나도 건강해도 나의 몸입니다. 그런데 병이 난 몸을 싫어합니다. 병 없는 건강한 몸으로 회복하려고 하듯이 마음도 온갖 짜증 내고 괴롭고 걱정스럽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마음이지만 그런 마음을 깨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래면목이라고 하면 본래 모습입니다. 성내고 있는 것은 본래부터 성내는 것이 아닙니다. 짜증을 내는 것도 본래부터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운 것도 본래부터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내기 전에 짜증을 내기 전에 괴롭기 전에, 본래부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디에서부터인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모든 생각의 근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을 깨닫지 않아도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바깥에 종소리가 나거나 목탁 소리가 난다면 누구든지 종소리이고 목탁 소리인 줄 압니다. 또 눈앞에 물체가 오고 가고 하게 되면 차가 지나가는구나, 사람이 오는구나 저절로 알게 됩니다. 또 찬바람이 불게 되면 찬바람이 피부에 닿자마자 차구나, 덥구나 하고 저절로 압니다.

찬 줄 알고 종소리인 줄 알고 물체인 줄 아는 이것이 생각을 해서 기술을 부려서 어떻게 해서 알아 지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앞에 물체가 오면 물체인 줄 압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 곤충까지 똑같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닫거나 깨닫지 않거나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깨달은 사람은 여태까지 고통 속에서 살던 삶이 깨달음으로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바로 본래면목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자신이 알고자 하는, 요구하는, 구하고 있는 그 본래면목에 도달하겠습니까?

지금까지 부지런히 해왔습니다. 사람마다 마음 깨닫고자 하는 방법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 염불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여러 가지입니다. 결국, 무엇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공을 들인 것으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목표물을 찾아내었다고 하면 대단한 성과를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애를 썼는데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면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여기에서, 모든 생각을 접어버리고, 조용히 눈감고 앉아서 옛 조사 스님은 어떻게 깨달았다고 들었던 이야기나 책에서 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결론이 무엇이냐면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물건입니다.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와 같은 물질은 형태는 있지만 생각하지 못합니다.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지만, 곳곳에 마음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왜,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압니다. 아는 놈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이라는 자가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고통이나 괴롭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기 위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자주 비유합니다. 파도가 찰랑찰랑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쪽 파도, 저쪽 파도가 일어나서, 우리는 어디에서 일어났으며 이렇게 살고 있지만 결국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게을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쉬지 않으며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고, 다시 말하면 파도를 치고 또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도들을 향해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요란하게 애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터득하셨습니까?”
“우리가 업장이 두터워서 그런지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오늘은 일체 파도를 쉬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됩니까? 놓치지 않고 계속 애를 쓰며 붙잡고 있어야 깨닫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별수 없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제 말을 듣고 푹 쉬어 보시기 바랍니다. 파도도 치지 말고 편안하게 있어 보십시오.”
“그 소리를 듣고 보니 참 그렇습니다. 오늘은 쉬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쪽 파도, 저쪽 파도 모두 쉬어 보니까 이쪽 파도도 없고 저쪽 파도도 없으니 파도 없는 물입니다. 파도 자체가 물입니다. 파도는 본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파도는 물의 움직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파도는 없어졌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파도가 이 물에서 생겼고 이 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본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움직이고 있는 것을 쉬어버리면 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주인공, 나의 본래면목, 이 생각이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그렇게 생각해도 찾지 못했다면, 가만히 있어 보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이라고 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본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하며 일단 생각을 쉬어 봅니다. 도를 깨달아야겠다, 진리를 알아야겠다, 불법이다, 온갖 생각을 싹 쉬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생각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각 때문에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것이 생각을 놓아버리면 저절로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앞에 두고 몸부림치고 있었구나,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본래 깨닫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본래 성불이다, 깨닫고 나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부처님이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모든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곳에서 벗어나자 그것과 계합(契合)이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알았다고 하는 이때를 ‘시각(始覺)’이라고 합니다. 시각을 한 입장에서 시각 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나와 똑같이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찬물을 마시면 찬 줄 압니다. 깨닫고 깨닫지 않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깨달았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절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나 너희들도 찬 줄 안다. 찬 줄 아는 이것을 돌이켜 보라.”

종소리가 나면, “소리가 잘 들리느냐. 소리가 잘 들린다면 소리 있는 소리는 잘 듣고 있는데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있느냐? 그것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소리 없는 소리는 어떻게 듣습니까? 소리 있는 소리는 누구든지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리 없는 소리까지 들어야 일체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수심결(修心訣)’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까막까치가 나무에서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자,
“저 소리가 잘 들립니까?”
“네. 잘 들립니다.”
“이번에는 그 소리를 듣지 말고 소리를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돌이켜보시오. 거기에도 소리가 있습니까?”
밖으로는 분명히 소리가 있습니다. 물체도 있고 냄새도 있지만, 소리를 듣고 있는 마음을 돌이켜 보면 소리가 있습니까? 소리는 물론 일체의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돌이켜 본 즉, 일체 소리랄 지 일체 시비라고 할지 일체의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답이 나옵니다.

선문에도 보면, 일단 칭찬을 합니다.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소리를 관(觀)하여 진리의 문에 들어왔도다. 그대가 지금 소리를 듣고 있다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소리를 돌이켜보며 소리 없는 자리로 들어왔다. 그대에게 다시 질문하겠노라. 그대는 그 자리, 일체 소리도 없고 일체 좋고 나쁜 시비가 끊어지고 아무것도 없다고 할진 데, 그렇다면 텅 비어서 허공이 아니냐?”
“허공이 아니올시다.”
“허공이 아닌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소소영영(昭昭靈靈) 하여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압니다. 이것은 허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용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뜨고 있으면 앞의 물체가 보이고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나는 줄 압니다.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온전하냐 온전하지 못하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잘 보이고 잘 들리다가도 조금만 있으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앞의 물체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졸고 있기 때문입니다. 졸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졸지 않았다면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면 눈앞의 벽이 보이지 않고, 들리긴 하지만 무슨 소리인 줄 모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생각이 가렸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환상입니다. 진리가 환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도가 환상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 환상을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환상 아닌 놈이 환상하는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그 그림은 화가가 아닙니다. 그림일 뿐입니다.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있는 자체는 각(覺)입니다. 각은 환상 속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그 생각을 쉬어버리면 생각 아닌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임제록(臨濟錄)’에도 “구하지 말라. 찾지 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지고 찾으면 찾을수록 거리가 떨어진다. 구하지 않으면 그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수많은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옛 조사 스님들이 이렇게 깨달았다,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자신인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조용히, 정말 그럴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본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떠오르는 모습은 환상입니다. 환상도 마음이지만, 마음속이 환상으로 가리다 보니 환상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눈앞에 벽이 보이는데 무슨 생각에 사로잡히면 벽은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종소리가 들려오지만, 생각에 가리다 보니 종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딱 놓아버리면 벽이 보이고 종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알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가리고 어두워졌구나, 이것이 결론입니다. 무심(無心)이라고 하면 눈 감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짜 무심이 아닙니다. 진짜 무심은 이것조차 없는 것입니다. 눈앞의 장애물이 바로 망상, 분별, 혼침, 무심이라는 생각입니다. 생각도 없고 혼침도 없고 산란도 없으면 눈앞에 저절로 산이 보입니다.

그래서 “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이요, 창해망망적멸궁(滄海茫茫寂滅宮)이라,” 이 말을 듣고 이때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푸른 산을 어찌 부처라고 합니까? 푸른 바다가 어찌 부처입니까?”
“아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음이 부처이지 어찌 나무와 물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부처라고 할 수 없다. 망상분별이다. 모든 생각을 다 떨쳐 버렸을 때 나타난 푸른 산과 물이 보일 때 그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소리 법문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놓아두고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문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지?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지? 어떤 때는 성내고 어떨 때는 기뻐하는 이 자체가 자신이 아니냐?”
기뻐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임시의 잠시의 모습이지 그 환상은 사라집니다. 그 속에 불생불멸의 각(覺)이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각이 온갖 생각에 사로잡히면 객진번뇌(客塵煩惱), 주인이 손님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주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웃어도 내가 웃어야지요, 성을 내도 내가 성을 내면 괜찮습니다. 성내고 웃는 손님 보내버리면 아무 피해 없습니다. 내가 언제 웃었느냐 성내었느냐 흔적도 없이 본래 모습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되 본 바 없고 듣되 들은 바 없고 하되 한 바 없다는 말과 딱 계합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생각을 많이 하신 분이라면 이 소리에 큰 힌트를 얻을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했던 ‘수심결’의 한 구절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자가 물어보기를,
“어떻게 해야 자기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공부를 하고 방편을 지어 한 생각을 돌이켜 마음을 깨칠 수 있습니까?”
“자기 마음인데 거기에 무슨 방편을 지으려 하는고?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깨치려고 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보이지 않는가. 보인다고 하는 것은 눈이 있다는 의미다. 나에게 있는 줄 알고 잃어버리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본 것이 된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아서 이미 신령스럽게 알고 있다. 어찌 다시 알려고 하겠느냐. 굳이 알려고 애쓰면 알 수 없다.”

눈을 보겠다고 애쓴다면 눈을 볼 수 있겠습니까. 마음도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줄 아는 자는 눈을 알기 때문에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볼지언정 자기 눈을 보려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도 그렇잖아요. 스스로 알고 있는 이것을 빼놓고 다시 마음을 돌이켜봐야 나옵니까?

“다만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곧 이것이 견성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8월14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3년 하안거 해제 법회에서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1501호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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