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기개는 어떤 상황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중국의 여산 혜원 스님이 동진의 실권자 환현에 맞서 출가자는 왕에게 예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천명한 일이나 정영사 혜원 스님이 북주 무제가 불교말살 정책을 펼 때 면전에서 “아비지옥은 귀천을 가리지 않거늘 폐하는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오”라고 외쳤던 일. 백곡 처능 스님이 장문의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려 조선의 척불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일도 그렇다.
근현대불교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와 맞섰던 고승으로는 만공 스님(1871~1946)을 꼽을 수 있다. 만공 스님이 근현대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스님의 제자로 선학원 창건을 비롯해 조선불교 선종 창종 및 수좌대회 개최 등 실질적인 선의 대중화를 주도했다. 일제가 전통불교 통제를 시도할 때 선승들이 계율수호, 불교정화를 위한 유교법회를 개최하고 범행단을 발족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만공 스님이 있었다.
만공 스님의 기개가 유감없이 드러난 ‘선기발로(禪機發露)’ 사건은 1937년 2월말 벌어졌다. 이때는 일제의 불교장악과 자주적인 건설운동이 교차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 주관아래 31본산 주지회의가 처음 소집됐고 그 자리에는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도 참석하고 있었다. 26일과 27일 이틀간 열린 회의는 일제가 의도하는 종단으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자주적인 종단으로 운영될 것인지 판가름 나는 분수령이었다.
학술적으로 이를 처음 조명한 김광식 동국대 교수의 논문(‘만공의 정신사와 총독부에서의 선기발로 사건’)에 따르면 26일 시작돼 27일 밤늦게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총독부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불교를 통제할 수 있는 기관 설립의 당위성과 이를 인정할 것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총독의 한마디에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서슬 퍼런 분위기에 아무도 말을 못할 때 침묵을 깬 것은 만공 스님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만공 스님은 “경에 말씀하기를 비구 한 명을 파계케 한 죄악은 삼아승지겁 동안 아비지옥을 간다 하였사오니 이 같은 (조선의) 칠천명 승려로 하여금 일시에 파계케 한 공 이외에는 (총독이) 무슨 그리 대단한 업적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만공 스님은 작심한 듯 한국불교의 모순이 식민지 불교정책에서 기인했음을 적시한 뒤 향후 조선불교를 자주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일제의 불교 장악을 본격화하려는 순간에 조선의 선사가 의도를 꿰뚫고 일갈을 한 것이다. 구전 기록에는 만공 스님이 총독에게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을 때 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회의가 끝나고 관헌들이 스님을 체포하려 했으나 총독이 만류했다고 전한다.
선학원의 석우, 적음, 남전 스님 등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만공 스님을 맨발로 맞으며 “조선은 죽었어도 불교는 살아 있다”고 가슴 벅차게 외쳤다고 한다. 만해 스님도 그 사건을 ‘선기발로’라고 명명한 뒤 “선기법봉(禪機法鋒)의 쾌한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조선불교사의 한 페이지가 여기에서 빛나는 것을 아는가?”라며 만공 스님의 기개를 극찬했다.
만공 스님은 1942년 서산 간월암에서 조선광복을 발원하는 천일기도에 착수했고, 기도 회향 3일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 수덕사 만공선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의미의 ‘世界一花(세계일화)’는 만공 스님이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16일 쓴 유묵이다.
74년 전 우리가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사를 두려워 않는 선현의 기개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식 교수는 “이제는 독립운동의 범주를 직접적인 항쟁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적 저항활동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날이 오면 그 첫 대상자가 만공 스님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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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호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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