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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설 같은 이야기 가득한 푸른 도시

무슬림 여성들 천으로 얼굴 가리게 만든 비비하눔 ‘운명의 키스’

중앙아시아 최대 모스크 비비하눔
티무르가 가장 사랑한 왕비 이름
건축가의 유혹 넘어가 결국 처형

티무르 일가의 무덤 구르 에미르
구소련 학자들 관 열어 사실 확인
‘세계혼란’ 글귀…독일, 소련 침공

​​​​​​​우즈베키스탄 명소 레기스탄 광장
아름다운 야경에 늘 관광객 북적
과거 이슬람 교육 중심지로 명성

사마르칸트의 상징 ‘레기스탄 광장’에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이슬람 세계의 보석으로 불리는 푸른 도시 사마르칸트에는 아미르 티무르와 관련된 유물이 상당수 존재한다. 티무르에 의해 다시 세워진 도시인만큼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격 되는 곳이 중앙아시아 최대 사원이라는 ‘비비하눔 모스크’다. 사마르칸트의 중심 타슈켄트거리 끝자락에 높게 솟은 에메랄드빛 돔의 아름다운 사원이 그곳이다. 비비하눔은 티무르의 여덟 왕비 가운데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1398년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이슬람 세상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모스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제국의 각지에서 200여명의 장인과 500여명의 노동자를 선발하고, 대리석 운반을 위해 인도에서 코끼리 95마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현장에 나가 작업을 독려하고, 음식물을 제공하며, 주화로 포상하는 등 모스크 건립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았다. 

그 결과 비비하눔 모스크는 높이 35m에 달하는 에메랄드빛 돔과 직경 18m의 아치형 정문, 50m 높이의 미나레트, 가로 167m 세로 109m의 대리석 안뜰, 그리고 400개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는 400개의 둥근 천장 갤러리를 가진 화려한 모습으로 조성됐다. 실내 또한 아름다운 대리석과 다양한 형태의 모자이크 테라코타 등으로 치장돼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궁정의 역사가들은 ‘모스크의 돔은 마치 하늘을 보는 것 같고, 모스크의 아치는 마치 은하수를 보는 것 같다’고 기록했다. 1404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스페인의 외교사절 루이 곤잘레스는 “비비하눔 모스크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건축물”이라고 극찬했다.
 

 중앙아시아 최대 사원인 ‘비비하눔 모스크’.

비비하눔 모스크를 세상에 더욱 널리 알린 것은 ‘운명의 키스’ 이야기다. 모스크 건립에 동원된 페르시아 출신의 한 젊은 건축가는 비비하눔을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비비하눔은 건축가에게 공사를 서둘러 마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고 했고, 비비하눔을 연모하던 건축가는 키스를 요구했다. 비비하눔은 푸른색이 나는 물과 투명한 물이 담긴 잔을 주며 건축가에게 마시게 했다. “물의 색깔은 달라도 맛은 모두 같다”며 자신을 제외한 누구와의 키스도 허용한다고 했다. 그러자 건축가는 두 잔의 물을 비비하눔에게 보여 주며 마시게 했다. “보기에는 모두 맑은 물이지만 하나는 설탕물이고 하나는 맹물입니다. 외형이 같다고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비비하눔은 결국 볼 키스를 허락했고, 이로 인해 왕비의 볼에는 반점이 남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반점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됐고, 가차 없이 건축가의 목을 벴다. 비비하눔 또한 미나레트 꼭대기에서 땅으로 던져 죽이는 형벌에 처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티무르는 제국의 모든 여성들에게 천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비비하눔 모스크 맞은편에는 비비하눔 왕비의 영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사랑했던 비비하눔을 처형하고 괴로워하던 티무르가 그녀를 잊지 못해 만든 곳이라고 한다.

사마르칸트에는 실제 티무르가 묻힌 무덤도 존재한다.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뜻의 ‘구르 에미르’가 그것이다. 구르 에미르의 주인공이 밝혀진 것은 티무르 사후 500여년이 지난 1941년 구소련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곳은 티무르가 1403년 페르시아 원정 중 전사한 손자 무함마드 술탄을 위해 지은 무덤이다. 1404년 완공돼 무함마드 술탄이 묻혔고, 이듬해 중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떠난 원정길에서 급사한 티무르 또한 이곳에 묻혔다. 중앙의 관이 티무르의 것이고, 북쪽은 티무르의 스승, 오른쪽은 무함마드 술탄, 왼쪽은 아들 샤 루흐의 관이다.
 

위대한 왕이며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티무르의 손자 ‘울르그벡’의 동상.

이곳에도 전설 같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티무르의 관을 열어 티무르가 몽골계이고,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부자유스러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관 안에서 ‘내가 이 관에서 나갈 때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새겨진 글귀도 확인했다. 그런데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티무르의 관을 연 며칠 뒤 히틀러의 독일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이곳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모두 티무르의 무덤에 손을 댄 탓이라고 믿고 있다. 티무르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절대적인 믿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도, 오랜 세월 다양한 민족에게 침략을 받아 더 이상 이곳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마르칸트의 상징은 단연 ‘레기스탄 광장’이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땅’을 의미하는 말로 레기스탄은 운하 주변 모래가 쌓여 조성된 너른 공터다. 레기스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마르칸트를 파괴한 칭기즈칸에 의해 처음 주목을 받아 도시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칭기즈칸은 이곳에서 알현식과 사열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을 집행했고, 티무르 시대에는 제국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르그벡 시대 처음으로 마드라사가 세워졌고, 현재 광장의 모습은 17세기 사마르칸트를 통치한 지방관 얄랑투쉬 바하지르에 의해 2개의 마드라사가 추가로 건립된 이후다.
 

아미르 티무르 일가가 묻힌 ‘구르 에미르’. 중앙의 검은 옥으로 된 관이 티무르의 것이다.

3개의 마드라사가 건립된 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구소련 시절에는 종교탄압으로 인해 노천시장으로 전락했다.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해 50숨 지폐의 모델로 사용되는 등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명소로 꼽히고 있다. 특히 레기스탄 광장의 야경을 배경으로 1997년부터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전통음악축제 ‘샤르크 타로날라리(동방의 선율)’가 세계에 소개된 후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장소가 됐다.

15세기 레기스탄에 처음으로 세워진 울르그벡 마드라사는 광장 왼편에 위치한다. 위대한 왕이며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울르그벡은 1394년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티무르와 함께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니며 견문을 넓혔고, 열다섯 나이에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는 지배자가 됐다. 울르그벡이 남긴 대표 유산은 문화와 교육이다. 세종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그는 세종과 마찬가지로 별자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직접 천문대를 만들어 항성시 1년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계산했다. 이는 오늘날 정밀기기로 계산한 시간과 채 1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울르그벡은 전국 각지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마드라사에서 기숙하며 이슬람 신학과 세속의 학문을 연구하도록 지원했다. 수학과 철학, 천문학 등을 직접 강의하기도 했으며, 여성도 공부할 수 있도록 마드라사의 문을 개방하기도 했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 사마르칸트는 문화와 지식의 중심지였고, 그가 남긴 많은 유적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1449년 큰아들 압둘 라티프의 반란으로 울르그벡이 살해되면서 티무르제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울르그벡은 구르 에미르에 티무르와 함께 잠들어 있다.
 

레기스탄 광장 중앙에 위치한 ‘틸랴 카리 마드라사’ 내부. 황금으로 내부를 장식했다.

울르그벡 마드라사를 마주보는 건물이 레기스탄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시르도르 마드라사’다. 이곳 아치형 정문의 그림은 부하라의 나지르 지반 베기 마드라사를 빼닮았다. 사람 형상의 태양을 품은 사자가 흰 사슴을 추격하는 모습이 나선형 넝쿨 그림 속에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여기서 시르도르 마드라사라는 명칭이 나왔다. 시르도르는 ‘용맹한 사자’라는 뜻이다. 태양을 품은 사자와 관련해 당시 사마르칸트의 지배자 얄랑투쉬 바하지르를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과 이슬람 이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라는 주장이 공존한다.

아무튼 시르도르 마드라사가 완공돼 그 모습을 드러내자 이슬람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이슬람에서는 추상적이거나 상상력 위주의 문양을 허용할 뿐 현실적인 묘사는 엄격히 금지했다.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사람은 물론 동물을 새기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르도르 마드라사를 지은 건축가는 엄청난 비난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단 건축’에 대한 책임을 죽음으로 대신해야 했다. 반면 얄랑투쉬 바하지르는 전통에 기반한 마드라사를 짓는 것으로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위대한 건축물이 레기스탄 중앙에 위치한 ‘틸랴 카리 마드라사’다.

‘황금을 입혔다’는 뜻의 틸랴 카리는 이름 그대로 마드라사 내부를 황금으로 장식했다. 섬세한 황금 나뭇잎 조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벽과 천장 전체를 장엄하고, 기둥에도 코란의 경구를 금으로 새겨 넣었다. 얄랑투쉬 바하지르는 당시 이슬람 사회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어떤 건축물보다 화려하게 틸랴 카리를 조성했다.

이슬람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17세기 이후 건축물에 대해 과거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조금은 유연해졌다. 현재 틸랴 카리 마드라사 내부에는 사진과 그림으로 구소련 시대 레기스탄 광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501호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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