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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학인시절 감탄 잘하는 감성제일존자였습니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감성이란 것은 그렇지 않아
 
감성 부족하면 감사할 것도
감사할 일도 사라지게 돼
작은 것에도 감탄 습관을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 에피소드1
지난 초하루 법회 때 일이었다. 한참 법문을 하고 있는데 노보살님 한분의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청춘~을 돌려다오~♬” 조용한 법당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했다. 다들 멋진(?) 벨소리에 킥킥댔다. 그러나 그 보살님은 벨소리를 잘 듣지 못하시는지 꺼질 때까지 그냥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전화기 벨이 다시 울렸다. 어쩌면 자식들의 안부 전화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 법문시간에 재밌는 말씀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보살님이라 ‘감성이’의 너그러운 마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세 번째 벨이 울렸다. 이쯤 되면 누군가 옆구리를 한 번 쳐 줘야 맞다. 맘이 좀 너그러운 편인 나도 누가 그래주길 바랐다. 그래야 법회 진행이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성이’가 약간 짜증스럽게 혼자 말을 했다.
 
“아니, 세 번은 너무 하잖아. 나가서 전화를 받던지, 아니면 전화기를 꺼야지. 남한테 피해를 끼치면 되겠어?” 

대중의 눈치를 챈 내가 ‘주관이’의 입을 빌어 보살님께 한 마디 했다. 

“보살님! 부탁이 있어요. 다음부턴 법회 때 전화기를 좀 꺼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벨소리 때문에 하던 법문을 잊어먹어 버렸어요.” 

끝까지 버티던 보살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스님! 뭐라구요? 제가요. 귀가 어두워서 잘 안 들려요. 전화기도 끌줄 몰라요. 죄송합니다.” 

대중이 ‘와~’하고 웃었다. 지나가던 ‘객관이’가 노보살님을 통해 “나이 들면 그럴 수도 있지요 뭐, 하하”하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했다. 

# 에피소드2
어느 날 길을 가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차와 그 차 앞에 있는 트럭이 싸움이 붙었다. 내다보니 초보운전 보살님이 신호대기중인 트럭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어머 어떡해, 큰일 났다.” 

보살님은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트럭기사가 목덜미를 잡고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쳤다. 

“이 아줌마가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응? 왜 가만히 있는 차를 들이 받어. 이제 어떡할거야?”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초보라서요. 보험사에 연락해서 보상처리 해드리겠습니다.” 
“아, 그건 아줌마가 알아서 할일이고 난 아무래도 목뼈가 이상한 것 같으니까 병원 가서 입원해야겠습니다.” 

아줌마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차에서 나와 두 분께로 다가갔다. 

“거 아저씨, 아줌마가 초보라서 아마 실수로 살짝 들이받은 것 같은데, 아줌마 차가 많이 찌그러졌고 아저씨 차는 별로 표시도 안나니 적당한 선에서 서로 합의 보는 것이 좋겠네요. 두 분 차에 다 염주가 걸린걸 보니 불자 같은데,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좋게 마무리 하시지요?” 

화를 내긴 했지만 초보 아줌마의 작은 실수임을 안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스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아줌마! 내차는 별로 표시도 안나니 그냥 가세요. 그나저나 아줌마 다친 데는 없어요?” 

“아이고, 아저씨 고맙습니다. 전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병원 가보시고 아픈데 있으면 치료 잘 받으세요, 저한데 꼭 연락주시구요.” 

보살님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고마움을 표했고 사고차량들이 합의를 보자 꽉 막혔던 도로는 금세 뚫렸다. ‘주관이’와 ‘이성이’가 ‘객관이’와 ‘감성이’ 덕을 본 것이다. 

“감성과 이성의 중요한 차이는 감성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반면 이성은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라고 캐나다 신경학자 도날드 칸은 이야기 했다. 그렇다. 진정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려면 논리적인 설득과 감성적인 울림이 어우러져야만 하는 것이다. 

해인사 학인시절, 도반들이 각자 특성을 살려 ‘해인총림 20대 존자’라고 재미삼아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다. 나는 ‘감성제일존자’로 불렸다. 무슨 일이든지, 무엇을 보던지 “이야!”하며 감탄을 잘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감탄제일존자’가 된 것이다. 감성은 감정에서 나온다. 점 하나 차이인데 둘의 차이는 크다. 감정은 누구나 있지만 감성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일어나는 감정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감성이다. 그런데 그 알아차리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습관이 모여 업식(業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성이 아닌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대체로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 감성이 부족하면 감사할 일이 없고 감사할 일이 없으면 감탄할 일도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인생은 재미없고 무미건조해진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감탄할 일을 많이 만들어야한다. 작은 일에도 진실로 감사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기적을 살고 있지만 그것이 기적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 상당히 객관적인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하면서 따져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객관이란 것은 그 사람의 주장이며 알음알이며 소견일 가능성이 많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자기를 합리화하며 내세우는 것이 ‘객관적’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나올 뿐이다. 결국 모든 일은 주관적 입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의 경계는 모호하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다. 즉 주관과 객관은 없다. 다만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자면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그에 따른 결과(結果)가 있다. 그것만이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금강경’에는 ‘나’라는 상(相)이 없으면 시비가 있을 것이 없다고 했다. 

행복과 불행은 본인의 견해에 있다. 열 가지 일을 했을 때 일곱 가지 일은 이루고 세 가지는 못했다고 치자. 세 가지 못한 일을 ‘주관적 마음’에 두고 끙끙대며 살 것인지, 일곱 가지 이룬 ‘객관적 일’에 마음을 두고 편하게 살 것인지의 선택은 본인에게 달려있다. 다음 법회 때는 시작하기 전에 주관과 객관을 꿰뚫는 직관과, 감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지성으로 한 마디 하고 시작해야겠다. “자, 여러분. 모두 핸드폰 꺼내세요. 그리고 전원을 꺼 주세요. 잘 못하시는 분은 옆에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 됐지요? 그럼 기도 시작하겠습니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501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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