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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㉙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⑧

황룡사 9층목탑은 중국과 백제 미륵사 중원 목탑 영향 받아

자장 스님의 신라 귀국은
신라와 당 외교 문제이자
급박한 국내정치와 직결

고구려 백제 연이은 침략
여왕의 권위 실추로 위기
국론의 통일 위해 탑 건설

전쟁에도 백제 장인 초청
80m크기 거대목탑 건립

​​​​​​​황룡사탑 건립 5년 전에
백제서 미륵사 목탑 건립
황룡사 탑에 영감 줬을 것

황룡사 추정복원도.

황룡사 9층목탑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 14년(645)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조성공사가 기획된 것은 그보다 2년 앞서 자장이 귀국한 때부터였다. 자장은 진골귀족의 출신으로 선덕여왕 7년(638) 당으로 유학을 떠나 5년 동안 당태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주로 수도 장안(長安)과 근교의 종남산(終南山)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오대산에 갔다는 것은 뒤에 만들어진 설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덕여왕 12년(643) 3월 16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것은 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속고승전’ 자장전에서는 “정관 17년(643) 본국에서 돌아오기를 요청하자, 황제에게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았다. 황제는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납의 1벌과 채색비단 5백단을 하사하였다. 황태자는 2백단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홍복사(弘福寺)에서 자장을 위해서 국행으로 큰 법회를 개설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 자장정률조에서도 “정관 17년 계묘에 본국의 선덕왕이 글을 올려 돌려보내주기를 요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과 채색비단 5백단을 내려주고, 그밖에도 예물로 준 것이 많았다”고 하여 같은 사실을 전해준다.

이로써 자장의 귀국은 일개 승려의 유학과 귀국이라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신라와 당 사이의 외교 문제이자, 신라 국내의 정치적 문제와도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장이 귀국하기 전해(642) 7월 백제의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여성을 빼앗았고, 이어 8월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남양)을 빼앗아 신라의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고, 동시에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함락하여 서쪽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백제는 진흥왕 15년(554) 중흥을 꾀하던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살해된 이후, 장기 집권한 위덕왕대(554~598)과 무왕대(600~641)를 거치면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즉위한 31대 의자왕(641~660)은 즉위 다음해부터 대대적인 신라 공략에 나선 결과였다. 반면 최대의 국가적 존망의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급거 당에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호소하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 간 김춘추는 죽령 서쪽의 땅을 돌려달라는 협박을 받고 억류당하는 수모를 받았을 뿐이었다. 김유신의 1만 결사대의 분전으로 겨우 풀려났으나 국가적 위기는 계속되었다. 다음해(643) 1월 신라는 당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면서 유학중인 자장의 귀국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선덕여왕 12년(643) 3월 자장은 본국의 요청으로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는 귀국하자마자 왕에게 탑 세우기를 건의했다. 자장은 당의 유학중 종남산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탑의 건립을 권유받은 바 있었는데, 귀국한 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우선 건의한 것이 탑의 건립이었다. 외환을 해결하기에 앞서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회복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일하는 국내의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였음을 인식하고, 정치적인 상징물로서 거대한 탑의 건립을 기획한 것이다. 추측컨대 당에 머무는 동안 원향선사의 권유 이상으로 낙양의 영녕사(永寧寺)나 조팽성(趙彭城)의 불교사찰 등의 거대한 목탑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의 의미를 체감한 결과였다고 본다.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자장이 귀국한 뒤의 탑 건립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정관 17년 계묘(3월) 16일에 당의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아뢰었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에게 문의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 阿非는 이름, 知는 존칭어미)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龍樹라고도 한다)이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거느린 소장(小匠)은 2백 명이나 되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다는 것을 보아 왕실 및 귀족들과 협의하여 탑의 건립을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선덕여왕 14년(645) 3월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는 찰주(刹柱)를 세우고, 그 다음해에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와 ‘황룡사찰주본기’에서 명기한 바와 같은 철반 이상(상륜부) 42척, 이하(탑신부) 183척, 전체 225척(약 80m) 높이의 거대한 9층목탑을 1년만에 완성하였던 것을 보아 내우외환의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공사가 상상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성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선덕여왕 14년에도 대외적으로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어 5월에는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전쟁(안시성전투)에 신라는 3만 명을 보내어 도왔으며, 그 빈틈을 타서 침공하여 온 백제에게 서쪽 변경의 7개 성을 빼앗기는 등의 위기는 이어졌다. 또한 대내적으로도 여왕에 대한 반대세력은 여전히 득세하여 그해(645) 11월 반여왕파의 중심인물인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미륵사지 추정복원모형.

한편 갑자기 탑을 조성하기에는 신라의 경험과 기술 또한 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서도 법흥왕대의 흥륜사를 비롯하여 선덕여왕대의 분황사・영묘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찰과 목탑의 건축은 계속되어 왔으나, 황룡사의 경우와 같은 거대한 목탑 건축의 경험은 없었다. 가장 늦은 시기인 선덕여왕 4년(635)에 세운 영묘사의 목탑지 기단부의 길이가 외측 원형유구직경 15m, 내측 원형유구직경 11m에 불과하였다. 이에 비해 황룡사 9층목탑지의 길이는 동서 28.8m, 남북 28.9m에 달하여 비교될 수 없는 크기였다. 이에 신라는 부득이 치열한 전쟁 상대였던 백제의 장인을 초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불교의 선진국이었는데, ‘주서(周書)’ 백제조에서 “승려와 사탑이 매우 많다”고 한 바와 같이 승려와 사탑이 대단히 많은 불교국가였다. 백제는 일찍이 15대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가 전래되고 그 다음해에 한산(漢山)에 사찰을 지었다고 하지만, 한성시대의 사찰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26대 성왕 5년(527) 대통사를 창건한 이후 사찰 건축이 이어졌다. 특히 사비로 천도한 이후 군수리사지・동남리사지・능산리사지・왕흥사지・정림사지・금강사지・부소산폐사지・미륵사지・제석사지 등 수많은 사지에서 목탑지가 발견됨으로써 목탑 조성의 경험이 계속 축적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능산리사지・왕흥사지・미륵사지에서는 사리장엄구(봉안기)가 발견됨으로써 조성의 절대적 연대를 알 수 있다. 즉 능산리사지 목탑은 위덕왕 14년(567), 왕흥사지 목탑은 위덕왕 24년(577), 미륵사지 서원 석탑은 무왕 40년(639)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목탑의 기단부 크기는 대개 한 변 12m 내외의 비교적 소형이었는데, 7세기 전반기 제석사의 목탑부터 대형화되어 하층기단 한 변이 21.2m, 미륵사 목탑지의 하층기단 한 변이 18.56m로서 황룡사지 목탑지의 하층기단 28.9m에 근접하게 되었다. 물론 자장이 당에 머물 때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낙양의 영녕사지 목탑지(516년 조성)의 기단부 크기 한 변 38.2m, 조팽성의 불사지 목탑지(534〜577년 조성)의 기단부 한 변 30m에 비해서는 크게 못 미치는 작은 규모였다. 

백제의 사지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미륵사지였는데, 특히 서원 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2009년 초층 탑신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가 발견됨으로써 미륵사 조성의 주인공이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무왕의 왕후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써 세간의 관심은 선화공주의 실재성에 대한 논란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미륵사지의 중심은 서원의 석탑이 아니고 중원의 금당과 목탑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륵사는 특이하게 3개 사원을 나란히 병치하는 이른바 ‘3원병렬식’ 가람배치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청암리사지나 정릉사지, 신라 황룡사지의 1탑3금당의 가람배치와 완전히 다른 것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같은 예가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가람배치는 미래에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고 3회 설법한다는 미륵하생신앙에 의거한 것이다. 미륵사의 3원 가운데 중원의 금당과 목탑이 동원・서원보다 크고, 목탑이 배치된 데 비해 동원・서원은 석탑이 배치되었으며, 중원이 동원・서원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중원이 주 가람이고, 동원・서원이 부속 가람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성시기도 중원을 먼저 조성하고 이후 서원・동원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중원의 목탑은 서원의 석탑이 조성된 무왕 40년(639)보다 앞서 이루어졌고, 크기도 석탑의 기단부 한 변 12.5m에 비해 훨씬 크다. 이로써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 조성에 직접 비교될 수 있는 백제의 목탑은 미륵사 중원의 목탑이었고, 나아가 645년 백제에서 초빙되어온 장인 아비는 5년 앞선 미륵사 중원 목탑의 조성에도 참여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라는 선덕여왕 14년(645)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상징물로서 9층목탑을 조성하면서 백제 장인을 초빙해 그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 두 나라 사이는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는 적대관계였다는 것이다. 백제 공장 아비의 갈등은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조에서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화 형태로 전해주고 있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은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췄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면서 컴컴한 속에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노승과 장사는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적국을 위해 목탑을 세워주는 백제 공장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슬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삼국유사’ 무왕조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할 때에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百工, 여러 분야의 장인)을 보내 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진흥왕대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 진지왕대 백제의 웅진(공주)에 가서 미륵선화 친견을 염원했던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 같은 승려들은 3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국경을 넘나드는 구도와 교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3국 사이의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교류 상황을 주목케 하는 대목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01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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