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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진의 고개지 유마힐을 그리다

기자명 주수완

이국적 화풍 중국적으로 발전시키며 토착화

중국회화 원조는 고개지부터
가늘고 섬세한 필선 리드미컬
필법이 ‘춘잠토사'로 묘사되기도
대상 캐릭터 뽑아내는 것 뛰어나
​​​​​​​
가장 유명한 와관사 유마힐 벽화
그림 보러 온 사람들 인산인해
사찰 시주 모으는 데도 큰 역할
‘점입가경'이라는 말 남기기도

동진시대 고개지의 ‘여사잠도’를 당나라 시대에 모사한 작품, 런던 브리티쉬 박물관.
북위 효창원년(525년) 조성의 미륵보살비상에 새겨진 유마힐의 모습, 중국 하남성박물원. 둘 다 전설적인 고개지의 와관사 ‘유마힐상'을 짐작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이러한 단편들을 모으면 어느 정도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br>
북위 효창원년(525년) 조성의 미륵보살비상에 새겨진 유마힐의 모습, 중국 하남성박물원. 둘 다 전설적인 고개지의 와관사 ‘유마힐상'을 짐작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이러한 단편들을 모으면 어느 정도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 동진(東晋, 317~420) 시기에 활약한 고개지(顧愷之, 344~406)는 중국 회화사에 있어 전설과도 같은 존재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위, 촉, 오 가운데 최후의 승자는 조씨도, 유씨도, 손씨도 아닌,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었다. 그는 위의 마지막 황제 조환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진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서진(西晉, 265~316)이라 한다. 그러나 서진도 반세기 만에 북방민족인 유연에게 멸망당하고, 옛 오나라의 수도였던 남쪽의 건강(지금의 남경)을 다스리던 사마예(司馬睿)가 서진에 이어 동진(東晋)을 건국해 명맥을 이었다. 

한마디로 집안싸움을 하던 중국이 겨우 통일되는가 싶었는데, 바야흐로 북방민족의 남하로 인해 이제는 국제전을 치러야만 했던 극도의 혼란기가 찾아온 것이다. 남쪽 한족의 입장에서는 동진이지만, 북방 흉노, 선비 등의 입장에서는 5호16국시대라고 불린다. 그런 시기에 서예의 원조라 할 왕희지(王羲之, 307~365)와 회화의 원조라 할 고개지를 배출했으니,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미묘하기만 하다.

고개지 이전에도 조불흥(曺不興) 같은 화가들이 드물게 이름을 남기고는 있지만, 그저 기록만 남아있을 뿐, 고개지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다거나, 혹은 작품이 실제 남아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중국회화사에서 작가론의 시작은 사실상 고개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고개지는 그림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사안(謝安)이라는 사람은 “그대처럼 그리는 사람은 인류가 생긴 이래 없었다”고 극찬을 했다 한다. 그의 행적을 논한 것을 보면 마치 니콜로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연주를 너무 잘 해 사람들이 그가 악마가 아닐까 의심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현재 고개지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 있지만, 진작은 아니고, 후대의 모사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방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전의 화가들과 고개지를 구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필법에 대해 비평가들은 “춘잠토사(春蠶吐絲)”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봄에 누에가 뽕나무잎을 먹고 누에고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실을 뽑아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가늘고 섬세한 필선이 부드럽고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면서 형체를 묘사했기에 일컬어진 칭송일 것이다. 붓질이 리드미컬한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리드미컬해야 한다. 그것이 ‘춘잠토사’다.

또한 평론가들은 그가 “형체를 옮겨 그리는 일에 있어 오묘하고 뛰어나다”고도 했는데, 솔직히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눈에는 초보적인 회화로 보인다. 이 정도 수준이 당시의 회화 수준에서 그렇게 보였다는 뜻인지, 아니면 지금 전하는 그의 모작들의 수준이 결코 원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현존 작품들, 즉 ‘여사잠도’나 ‘낙신부도’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이야기 그림이고, 또한 설화적·교훈적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 등장인물 개개인의 캐릭터를 표현하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더 중점을 둔 그림이기 때문에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특히 유명했던 장르는 인물화, 초상화였는데, 대상 인물의 캐릭터를 뽑아내는 일에 누구보다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의 작품들은 그려질 때마다 전설을 남겼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건강의 와관사라는 절에 그린 유마힐 벽화였다. 유마힐은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특히 석가모니의 지혜로운 제자 문수보살과 논쟁을 벌일 정도로 뛰어난 식견을 지닌 거사였는데, 그래서 문수보살과 논쟁하는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 고개지도 아마 그 장면을 그렸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장면을 그린 시초가 고개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와관사가 창건될 때 절에서 시주를 받았는데, 고관대작들도 10만전을 넘겨 시주하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었다고 한다. 이때 고개지가 시주장부에 100만전을 시주하겠다고 적어 사람들이 허풍이라고 비웃었던 모양이다. 이후 절에서 그 장부에 의거해 고개지에게 100만전을 달라고 하자 그는 “벽화를 그릴 벽면 하나만 비워달라”고 했다. 이윽고 그린 그림이 바로 ‘유마힐상’이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그는 “첫날 그림을 보러오는 사람에게는 입장료 10만전, 둘째날은 5만전, 그리고 셋째날에는 순서대로 입장료를 받으라” 하니, 첫날에 그림을 보러 모여든 사람만 해도 인산인해를 이루어 100만전을 쉽게 넘겼다고 한다.

재미난 것은 마치 아이폰의 새 모델이 출시되면 먼저 사려고 매장 앞에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둘째 날이나 셋째 날 더 저렴한 입장료로 그림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맨 처음 고개지의 벽화를 보고 싶어 곱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그린 유마힐은 눈에서 광채를 뿜어냈다고 하니, 누군들 빨리 보고 싶지 않았을까.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고개지가 이 불화를 돈을 받고 그려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재능기부 차원에서 그렸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림을 그려줌으로 인해 와관사에 많은 시주가 모이도록 했으니, 결국 절을 위한 봉사였던 셈이다.

왜 고개지인가? 당시만 해도 불교는 외래종교로서의 색채가 강했다. 마치 현재 절은 전통방식으로 짓고, 성당은 서양식으로 짓는 것처럼, 당시 불교는 서방종교였다. 그러던 차에 고개지라는 인물이 나타나 인도풍의 불교미술을 말하자면 중국풍으로 일신했던 것이다. 유마힐도 엄연히 비말라키르티라는 인도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불화에 등장하는 유마힐은 항상 중국풍의 옷을 입은 중국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처음부터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아마도 고개지가 중국풍으로 그린 와관사의 유마힐이 이후 롤모델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지난 글에 소개한 동로마의 티투스와 달리 토착 불교화풍을 선보인 것으로 생각되는 고개지. 이처럼 불교미술은 하나의 전통만을 이어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능있는 화가들에 의해 이국적인 화풍과 동아시아 화풍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온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화풍의 두 스타일은 이후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불교미술의 두 축을 형성하게 된다. 참고로 ‘점입가경’도 고개지가 했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주수완 고려대 초빙교수 indijoo@hanmail.net

 

[1501 / 2019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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