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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대 총무원장 초우 스님

‘세대교체론’ 앞세워 종단혁신 꿈꿨지만 종회와 갈등으로 좌절

1947년 15세 때 해인사로 출가
월하 스님에 건당해 통도사 문중
종회의원·통도사 주지 등 역임

성수 스님 불신임 이끈 중진들과
종단 혁신 위한 세대교체 내세워
47세 나이로 총무원장에 선출

불국사·월정사 주지 폭력사태에
지지기반이던 종회와 갈등으로
6개월만에 총무원장에서 물러나

19대 총무원장 초우 스님(사진 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2004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조계종 홍보국 제공
19대 총무원장 초우 스님(사진 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2004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조계종 홍보국 제공

1981년 5월28일 조계종 중앙종회는 18대 총무원장 성수 스님을 불신임하고 19대 총무원장으로 초우 스님을 선출했다. 중앙종회가 현직 총무원장을 불신임한 것은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언론들은 총무원장 불신임 배경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을 내놨다. 그 가운데 성수 총무원장 선출과정에서 배제됐던 40대 중진스님들의 ‘세대교체론’이 불신임의 배경이 됐다는 데 무게가 실렸다.

이 무렵 중앙종회를 움직이는 핵심세력은 월주, 의현, 초우, 진경, 천장, 봉주, 벽파 스님 등을 중심으로 한 40대 그룹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개운사‧조계사 분규’과정에서 중앙종회를 통해 성장했으며, 1980년 4월 종단분규를 딛고 월주 스님이 17대 총무원장에 선출되면서 종단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그해 10월27일 신군부에 의한 법난이 발생하면서 월주 총무원장 체제는 6개월 만에 좌초됐고, 월주 스님을 비롯해 의현, 진경, 천장, 봉주 스님 등은 신군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중심이 된 6대 중앙종회도 사실상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러는 사이 조계종은 원로들을 중심으로 과도집행부인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켰다. 정화중흥회의는 종헌종법을 정비해 종단운영의 새 틀을 마련했고, 이 종헌에 따라 원로회의는 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성수 스님을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10‧27법난으로 종단 중심부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던 40대 중진그룹들은 배제됐다. 이런 배경에서 출범한 성수 총무원장 체제는 정치적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1981년 6월10일자)’는 “성수 총무원장이 현재 조계종을 움직이는 상당수 중진승려들이 배제된 채 정화중흥회의에서 선출됐다는 것은 출범당초부터 어딘가 기둥이 빠진 모습이었다”면서 “(성수 스님의 여러 실책이 드러나면서) 총무원장을 지탱해줘야 할 기둥들이 28일 중앙종회에 나타나 불신임 결의를 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성수 스님을 불신임한 중앙종회는 이날 종무원법을 개정해 40대 총무원장의 길을 열었다. 정화중흥회의는 앞서 총무원장 자격을 연령 50세 이상 승랍 30년 이상으로 규정했지만, 이날 중앙종회는 연령 45세 이상 승랍 25년 이상으로 낮췄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몇몇 중앙종회의원들은 총무원장의 자격을 하향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천장‧의현 스님 등은 “50세 이상의 스님을 두루 찾아봤지만 인재를 찾기 어렵다” “사회에도 25년이면 어느 기관이건 정점에 이른다”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이날 중앙종회는 “결의와 동시에 효력이 발생한다”는 생소한 부칙까지 만들어 종무원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이는 당시 47세의 중앙종회 부의장 초우 스님을 총무원장에 선출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중앙종회는 다시 6월9일 67차 임시회를 열어 성수 스님의 사표 제출을 이유로 66회 임시회에서 진행한 ‘불신임 결의’를 철회했다. 총무원장 불신임 결의에 도의적 책임을 표명한 법전 스님을 대신해 의현 스님을 새 종회의장으로 선출했으며, 원로회의 인준을 받은 초우 스님을 새 총무원장으로 추인했다. 이로써 초우 스님은 19대 총무원장으로 확정됐다.

초우 스님

193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초우 스님은 1947년 해인사에서 동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해 가을 해인사에서 효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5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0년에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법사로 건당했다. 해인사로 출가한 초우 스님이 통도사 문중으로 분류된 것도 이 때문이다. 통도사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이후 1961년부터 오대산 상원사를 시작으로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도리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하며 구도행을 이어갔다. 한 번 앉으면 일어설 줄 모른다고 해서 ‘말뚝 수좌’라는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1971년 12월 3대 중앙종회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종단에 첫발을 내디딘 스님은 이후 7대 중앙종회까지 내리 당선되면서 종단 정치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1973년 통도사 주지, 1974년 총무원 재무부장을 맡으면서 종무행정의 역량도 키웠다. 이런 경험은 초우 스님이 40대에 총무원장에 선출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불교신문(1981년 7월5일자)’에 따르면 초우 스님은 6월28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취임법회에서 “반복과 시비로 얼룩졌던 1960~70년대 불교에서 벗어나 수행하는 종단으로의 재건”을 강조했다. 현대 불교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승려자질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초우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조계종의 역사와 실상을 밝히는 ‘백서’발간을 추진했다. 2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경, 포교, 인재양성의 종단 3대 사업에 대한 성과를 검토하고 조계종이 안고 있는 현안과 한국불교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전 과정을 총망라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조계종의 새 진로를 모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전국 전통강원과 선원의 교육체계를 대폭 개편하는 등 승려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했다.

초우 총무원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종단은 안정을 되찾았다. 40대 중진들이 장악한 중앙종회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종단 권력의 불균형에 따른 불안요소도 해소했다. 여기에 종단 내부에서 젊은 불자와 스님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불교변화의 바람도 초우 총무원장 체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요소가 됐다.

‘조계종사(현대편, 교육원)’에 따르면 이 무렵 교단 내부에서는 민중불교운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억압된 유신체제하에서 무기력했던 기성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출판한 민중불교운동은 사찰의 폐쇄성과 반민중성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와 민중에 기여하는 불교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젊은 불자들이 중심이 됐던 민중불교운동은 이후 종단 내 소장파 승려들에게도 유입되면서 한국불교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1981년 7월13~16일 중앙승가대에서 열린 청년승가육화대회도 그런 흐름의 일환이었다. 젊은 학인스님들은 이 대회를 통해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자체적인 개혁안도 수립했다. 종단 집행부의 제도개혁과 더불어 젊은 학인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불교혁신 논의는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경향신문(1981년 7월9일자)’는 “40대로 세대교체된 새 집행부가 체질개선에 나서면서 조계종에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우 스님이 총무원장에 당선돼 걸었던 ‘꽃길’은 여기까지였다. 순탄할 것 같았던 초우 총무원장 체제는 취임 한 달여 만에 단행된 불국사‧월정사 주지 인사로 급격히 흔들렸다. 불국사 주지 문제는 전임 총무원장 성수 스님을 불신임에 이르게 했던 사안이기도 했다. 전임 주지 월산 스님이 상좌 성타 스님을 천거한 것에 반발해 월서 스님이 주지 신청을 하면서 촉발된 불국사 주지 문제는 문중 내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꼬일 대로 꼬여 있는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초우 스님은 7월15일 불국사 주지에 월서 스님을, 월정사 주지에 능혜 스님을 임명했다. 그러자 불국사 전 주지 월산 스님 측이 강하게 반발했다. 월산 스님 측은 7월23일 대구지법 경주지원에 ‘불국사 주지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한 데 이어 신도들을 동원해 신임 주지 월서 스님의 사찰 진입을 막았다. 급기야 7월24일 불국사 입구에서 전 주지 측과 신임 주지 측간의 몸싸움이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면서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동아일보(1981년 7월25일자)’는 스님들이 몸싸움하는 사진을 “‘잿밥’싸움, 주지 놓고 승려 활극”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고, ‘경향’ ‘매일경제’를 비롯해 방송 등 대다수 언론이 주요뉴스로 다뤘다. 이 사건으로 불국사 일부 스님들은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때를 같이해 월정사에서도 신임 주지 부임을 두고 전임 주지 측과 신임 주지 측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7월30일 전임 주지 측의 반대로 사찰 진입에 실패한 신임 주지 능혜 스님은 이날 새벽 측근들을 동원해 뒷산을 넘어 월정사 경내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전 주지 측과 충돌이 발생했고, 양측의 대립은 경찰기동대 100여명이 출동하면서 진압됐다.

총무원장 초우 스님은 7월31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의 주지인사를 수용하지 않고 계속 항명할 경우 엄중 처벌하겠다”며 사태수습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원로회의 의장 영암 스님을 비롯해 중앙종회의장 의현, 호계위원장 도원, 인사위원장 천장 스님 등은 8월10일 중진회의를 열어 불국사‧월정사 분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중진회의는 “총무원의 주지발령은 적법절차에 따른 정당한 조치였다”며 총무원 집행부를 적극 옹호했다. 중진회의의 상당수가 초우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40대 중진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예상된 결과였다. 그렇기에 불국사 주지 문제로 불신임됐던 성수 스님과는 달리 초우 스님은 총무원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국사‧월정사 폭력사태로 인한 세간의 비판은 종단 집행부로 쏠렸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는 9월4일 68차 임시회를 열어 불국사, 석굴암, 신흥사, 낙산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지정했다. 이는 종단 3대 사업 추진에 따른 재원 마련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총무원 측의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불국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전환한 것은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됐다. 폭력사태 끝에 불국사 주지로 취임한 월서 스님은 총무원장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총무원도 월서 스님을 징계에 회부하며 강대강으로 맞섰다. 불국사 주지 인사 등으로 인한 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계속된 혼란은 초우 총무원장 체제를 압박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총무원장 초우 스님과 중앙종회의장 의현 스님과의 갈등설이 부각되면서 초우 총무원장 체제는 사면초가에 내몰렸다.

‘동아일보(1981년 12월15일자)’에 따르면 70차 임시회를 앞두고 중앙종회는 불국사 문제와 더불어 종단 예산을 들여 설립한 낙산어린이집에서 총무원 간부가 거액을 횡령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총무원 집행부를 강하게 추궁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총무원 집행부가 의현 스님의 개인행적을 내사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 사이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둘 사이의 갈등은 12월16일 열린 70차 임시회에서 노골적으로 표출됐고, 초우 스님과 의현 스님은 동반사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중앙종회는 12월18일 초우 스님과 의현 스님의 사표를 수리하고 법전 스님을 새 총무원장에, 녹원 스님을 중앙종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세대교체론’을 내세우며 출범한 초우 총무원장 체제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좌초됐다.

8대 중앙종회의원을 끝으로 종단 일선에서 물러난 초우 스님은 대구에서 사원주지연합회를 발족한 데 이어 불교회관과 청소년 수련관, 마하야나 불교대학을 설립하고 지역포교에 매진했다. 초우 스님은 2001년 영축총림 통도사 부방장, 2003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으며 2004년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지난해 3월26일 통도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72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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