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 수하독서도

기자명 손태호

나무아래 바위에 등 기댄 채 책 읽는 노승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의 작품
노스님 얼굴은 사실적인 반면
다른 것은 굵은선으로 간략히
바깥쪽 진하게 처리해 균형감

윤두서 作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모시에 수묵, 24.2×15.7cm,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 作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모시에 수묵, 24.2×15.7cm, 국립중앙박물관.

여름 더위가 절정은 지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더위의 기세는 맹렬합니다. 아마도 처서가 지나야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더운 바람 속에서도 시원한 기운이 꿈틀대며 여름과 작별할 채비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아무리 더워도 실내 어디에나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뿜어주고, 온갖 종류도 다양한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이 있으며, 동네마다 수영장도 있어 더위를 이겨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작은 선풍기 한 대가 고작이었고, 음료수는 어쩌다 손님이 오시는 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꿈의 감로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여름을 견뎠을까 의아스럽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더위로 고생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여름이니깐 당연히 더운 것이라 생각하며 더위를 쫓아내기보다는 그 온도에 순응하며 적응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여름하면 가장 떠오르는 기억은 슬래브 지붕 위에서 돗자리를 깔아놓고 당시 가장 좋아했던 고교야구 경기중계를 들으며 책을 읽었던 것입니다. 공부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소설책 읽기를 좋아하여 고전소설부터 현대소설까지 장르와 상관없이 많은 책을 읽곤 했습니다. 특히 탁 터진 옥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옥상 위 그늘 한켠에서 앉거나 누워 책을 읽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초저녁 어스름한 하늘에 떠오른 달과 샛별에 공연히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최고의 피서는 독서였으며 이런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책은 저의 가장 친한 벗이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은 책 읽는 시간이 줄어 책을 구입하는 속도가 책을 읽는 속도를 한참 앞서 아직 읽지 못한 새 책만 쌓여갑니다. 

오늘 함께 감상하려는 그림은 나무아래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 노승의 모습을 그린 ‘수하독서도’입니다. 이 작품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의 작품입니다. 노승이 등을 바위에 기댄 채 세상 편한 자세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옷 밖으로 살짝 나온 발이 맨발인 것을 보니 여름인데 어쩌면 개울에서 탁족이라도 즐긴 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벗겨졌고, 눈 밑 주름과 눈썹이 길게 내려온 것으로 보아 나이가 지긋하신 노스님이 분명합니다. 노스님의 표정은 책에 집중을 묘사한 검은색 눈, 눈 밑 잔주름, 꽉 다문 입 등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굵은 선으로 다소 간략하게 표현한 옷주름과 대비됩니다.

배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측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위로 나뭇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바위 아래보다 상단을 더 진하게 그려 바위의 무게감을 높여 둔중함이 더욱 느껴집니다. 그 위로 좌측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몰골법으로 묘사했는데 점차 아래로 휘어져 있습니다. 나뭇잎은 위는 넓고 아래는 뾰족한 역삼각형으로 마치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휘어진 가지와 더불어 그림의 주인공인 노승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뭇잎의 농담도 좌측에서 우측으로 갈수록 진해져 가지 끝에 있는 나뭇잎을 가장 진하게 그렸는데 이 또한 감상자의 시선 방향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림이 너무 오른쪽에 무게가 쏠린 듯 했는지 왼쪽에 작지만 진한 바위를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려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실제 인물을 사생한 듯한 생생한 노승의 표현과 다소 화보풍의 배경과 잘 어우러져 노스님의 편안하면서도 고요한 어느 여름날의 책 읽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인장은 우측 바위에 찍었는데 주문방형으로 ‘공재(恭齋)’를 찍은 이 인장은 윤두서가 자신의 작품 중 완성도가 높은 작품에 자주 사용하던 인장입니다.  

화가인 공재 윤두서는 효종의 스승이자 ‘어부사시가’로 유명한 윤선도(尹善道, 1587년~1671년)의 증손자입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일찍 과거를 준비하던 중 해남 윤씨가 속한 남인세력이 당화로 축출되면서 친 형을 비롯한 가까운 학문적 동지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생 오로지 가문을 지키고 학예를 닦는 일에 매진합니다. 학문은 박학다식하여 유학, 천문지리, 수학, 병법, 무기, 음악, 의학, 서예까지 모든 분야에 뛰어났지만 그 중 최고는 역시 그림입니다. 인물, 산수, 동물, 정물, 풍속 등 대부분의 화목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야는 인물화로, 국보 제240호 ‘자화상’은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사생력이 뛰어난 화가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 그림 또한 조선 최고의 말 그림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윤두서는 말 그림을 그리기위해 며칠이고 마구간에서 말을 관찰하며 마음속에 말이 완전히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린 후에 터럭이라도 틀린 점이 있다면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또한 윤두서는 호남 제일의 갑부 집안의 종손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자기 방에 불을 많이 피우지 말라고 할 정도로 검소하였습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빌려준 돈을 받아오라는 집안의 심부름을 가서 어려운 형편을 보고 빚 문서를 찢어버리기도 하였고, 노비 자식들이 대를 이어 노비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 여겼습니다. 노비에게도 이놈 저놈이 아닌 이름을 꼭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기근이 들면 자신의 재산을 내어 염전사업을 벌였고 그 수익으로 마을사람을 긍휼하여 기근 해결의 모범으로 조정에 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실천한 진정한 선비이자 화가입니다. 또한 해남 윤씨는 대대로 불교에도 매우 호의적이고 해남의 대흥사와도 인연이 깊어 윤선도는 대흥사를 노래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첫째 아들 윤인미는 ‘청허당대사비명(淸虛堂大師碑銘)’을 지었으며, ‘대둔사지’권2에는 윤두서와 아들 윤덕희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모로 많은 지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연은 후대로도 이어져 윤두서의 외증손자인 정약용은 해남 바로 옆 강진 유배시절 대흥사 일지암에 기거했던 초의선사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윤두서는 승려 그림을 그릴 때면 성총이라는 스님을 앞에 앉혀 두고 오랫동안 관찰해서 그렸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윤두서가 그린 다른 노승도에도 승려의 모습은 거의 비슷합니다. 따라서 ‘수하독서도’의 승려도 아마 성총이란 스님의 모습을 보고 그렸을 것입니다. 성총 스님이 누군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시기 호남에서 활약한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스님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백암성총 스님이 맞다면 이 작품은 1690년대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여름 날 독서에 몰입하여 책의 세계에서 노니시는 노스님을 보니 한동안 게을러 책을 가까이하지 못한 제가 살짝 부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책 읽는 그림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주니 책은 스승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02 / 2019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