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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스승과 제자, 自他不二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제자가 곧 스승이고 스승이 곧 제자입니다”

제대로 된 제자 기다린 달마
단박에 가르침 알아차린 혜가
달마·혜가의 극적인 만남은
스승과 제자의 상징적 모습
​​​​​​​
의식에 변화 주는 이가 스승 
제자는 스승에 물 들며 닮아가
알고보면 스승 아닌 존재 없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스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느니라.”

선종에서 너무나 많이 알려진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의 문답이다. 스승을 찾아 힘들게 소림굴까지 온 혜가는 허리까지 오는 눈 속에서 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근기를 점검해보는 달마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 비로소 제자로 받아들였다. 9년 동안 두문불출 면벽좌선을 하며 제대로 된 제자를 기다린 달마대사와, 막힌 공부를 시원하게 뚫어 줄 스승을 찾아 나선 혜가와의 극적인 만남이 바로 이 장면 ‘혜가단비(慧可斷臂)’이다. 제자의 무르익은 공부를 알아차려 마지막 손가락 한번 튕겨주는 스승과 그 한방을 제대로 알아차려 깨달음에 이르는 제자, 이것은 불가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무문관에서 수행할 때다. 어느 날 방에 벌이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한참을 여기저기 날아다니더니 문에 있는 유리에 붙었다. 그런데 유리 위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문 아래쪽에 틈을 만들어놓고 그쪽으로 살살 유도를 해도 그쪽은 본체만체하고 더욱 자기 고집만 피우며 몇 시간을 발버둥 쳤다. 좌선하는 코앞에서 벌이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니 정진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바로 옆에 나가는 곳이 있는데도 굳이 꽉 막혀 있는 유리와 씨름을 하고 있는 한심한 벌을 보고 있으니 학인 시절 해인사 보경당에 있던 벽화가 생각났다. ‘귀래위아개배(歸來爲我揩背)’란 제목이었는데 ‘돌아와서 나를 위해 등을 밀어다오’란 뜻이다. 

중국 당 나라 때 신찬 스님이 있었다. 출가하여 고향의 대중사에서 은사 계현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이후 백장 스님 문하에 가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은사에게 돌아오니 스님은 여전히 글만 들여다볼 뿐 자성을 깨치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은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드릴까 궁리하던 중 어느 날 목욕탕에서 스님의 등을 밀어주게 되었다. 열심히 때를 밀다가 갑자기 스님의 등을 한 대 치며 “법당은 참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라고 하니 은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제자가 다시 “영험도 없는 부처가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라고 하였다. 좋은 법당이란 육신을 두고 한 말이다. 영험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이 없다는 뜻이다. 보통 이 정도 같으면 제자 귓방망이를 후려 칠 텐데 뜻밖에도 스승은 느끼는 바가 있어 그대로 목욕을 마쳤다. 얼마 뒤 스승이 햇빛 잘 드는 창 아래서 한쪽 창문을 열어놓고 경전을 읽고 있었다. 마침 벌이 한 마리 방에 들어와 열려있는 문으로는 나가지 않고 닫혀있는 종이 창문에 붙어 밖으로 나가려고 계속하여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제자가 시를 한수 읊었다. 

“빈 문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창문에 부딪치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백 년 동안 옛 종이를 비벼댄들 어느 날에 나갈 기약이 있으리오.” 심상치 않은 상좌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은사가 그때야 자초지종을 물으니 백장 스님 문하에서 깨쳐 인가를 받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스승이 곧 바로 대종을 쳐서 대중들을 모으고 법석(法席)을 마련했다. 상좌를 법상에 올려 앉히고 자신은 밑에 앉아 제자가 되어 법문을 청했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비치어 근진을 벗어나며 체는 진상이 드러나 문자에 걸리지 아니하네. 참된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성하나니 다만 망연을 여의면 곧 여여불이라.” 

스승이 그 말에 깨달았다 한다.

이 고사가 어찌 공부 길에만 있겠는가. 바로 옆에 밖으로 나가는, 진리로 향하는 문제 해결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우매한 중생들은 그것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앞에 있는 창호지만 뚫고 나가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있다. 다행히 훌륭한 스승을 만나 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면 생사 해탈도 하고 골치 아픈 문젯거리도 시원하게 해결될 것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때가 되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껍데기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이라 하며,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새끼가 알 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 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 주는 스승과 같다. 쪼는 행위는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깨우쳐 주는 것도 이와 같다. 줄탁동시의 묘는 바로 기다림과 타이밍인 것이다. 이 시점이 일치해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난다. 

얼마 전 노사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 찾아와 차 한 잔을 나눈 적이 있다. 마침 쓰고 있던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글 주제를 화제 삼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용을 쉽게 설명해 달라 길래 농담 삼아 “줄탁동시란 동시에 줄을 탁하고 놓는 거지요”하고 웃은 적이 있다. 당시 노사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그 분은 무릎을 탁 치며 “이야!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이야기네요”하셨다. 줄탁동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행하여져야 하는 것과 그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 시대 서로 자기 쪽으로만 당기고 있는 줄을 동시에 탁 놓아버리면 상생하는 길이 생기지 않을까? 

스님은 스승님의 줄인 말이다. 스승과 제자는 1천겁을 통해 만나 찰나를 통해 깨달음을 주고받는다. 진정한 스승이란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스미고 번져나가야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나도 모르게 스승에게 물이 들어 그 스승을 닮아 가는 것, 가르침은 그런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이 없고, 늘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으니 내가 스승 되지 않음이 없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공부를 탁마하고 이끌어주어 마침내 완성시켜준다. 제자가 곧 스승이고 스승이 곧 제자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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