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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안현철의 ‘사명당’

난세 속 중생 구제에 나선 영웅 ‘사명대사’

한국형 영웅서사의 모범 답안
국난의 시기 중생 보호하고자
구국항마의 기치로 승병 조직
박정희 통치기 만든 국책영화
교리보다 영웅 성공담이 중심

영화 ‘사명당’은 스님이 주인공인 호국영웅 이야기를담은 대작이다. 사진은 영화 스틸컷.

난세는 민초들에게는 지옥의 행군을 강요하지만 영웅에게는 대항해를 할 수 있는 물결을 만들어준다. 일제강점기의 힘든 터널을 통과하면서 김구, 김좌진, 홍범도와 같은 인물이 역사의 장에 등장했다면,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장군은 포수에서 역사의 부름을 받고 독립운동의 리더로 성장한다. 임진왜란은 의병의 봉기를 통해 백성의 자위권을 회복하고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많은 의병장들이 역사의 물결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의병장은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특히 사명대사는 의병 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범해 각안 스님의 ‘동사열전’에 의하면 사명존자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泗溟) 또는 송운(松雲)이다. 사명대사는 형조판서 수성의 아들로, 밀양 삼강동(현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열다섯 살에 모친을, 열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는 등 조실부모했다. 이후 신묵 스님의 제자로 출가해 수행에 매진하던 그는 임진년(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영취산 재약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사명대사의 삶을 영화화한 안현철 감독의 ‘사명당’(1963)은 한국형 영웅서사의 모범답안에 가깝다. 

‘사명당’은 사명대사의 소년기에서 시작하여 임진왜란 발발 후 승병을 이끌고 구국항마의 대열에 합류한 승전기를 전반부로 배치한다. 서사 후반부에 조정의 파견으로 일본에 건너간 사명대사는 신통술로 적국의 장수와 막부 실세를 감화시켜 화친조약을 맺고 돌아와 다시 만행을 떠난다. 만행은 불교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적인 장면이다.  

사명대사는 소년기에 부친의 묘소 앞에서 스님에게 ‘능엄경’을 받게 된다. 스님은 “세상의 진리는 ‘능엄경’과 가슴에서 이루어진다”고 설한 뒤 떠난다. 이에 사명대사는 정혼녀와 장인에게 출가의 뜻을 전하고 결행한다. 정혼녀 금순도 출가하여 보련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당시 조정에서는 승가고시 존폐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이 팽배했다. 승가고시 존속론을 주장하는 측은 ‘불교는 만백성의 믿음이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유림 세력은 승가고시 폐지를 요구했다. 

결국 섭정 황후의 재가로 승가고시는 존속된다. 사명대사는 승가고시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고 출가한 보련 스님도 이 모습을 거리에서 바라본다. 성공한 가부장을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의 지지의 시선과 감격은 1960년대 한국 신파영화 공식에 가깝다. 황후가 승하한 후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사명과 스승은 법란을 피해 탐라국으로 떠난다. 선상에서 스승은 열반에 들고 사명대사에게 서쪽으로 가서 새로운 스승으로 모실 것을 유지로 남긴다. 

사명은 오랜 만행 끝에 그 스승을 친견하게 된다. 스승은 사명대사에게 “‘능엄경’과 ‘반야심경’을 정독하였느냐”고 묻는다. 그 스승은 바로 소년 응규(사명대사의 속명)에게 ‘능엄경’을 전했던 고승이었다. 사제는 서로 선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수행의 깊이를 헤아려본다. 스승은 사명에게 무술을 연마하게 하고 칼 쓰는 방법뿐 아니라 칼을 사용해야하는 명분을 일깨운다. 바로 “칼은 한 사람을 없애고 아홉을 구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사명대사는 산속에서 무예 수련을 마치고 하산한다. 만행을 하던 사명 대사는 샘물가에서 보련과 재회한다. 다시 만행의 길에 나선 사명대사에게 보련 스님이 함께 동행하길 울며 간청하지만, 사명 대사는 ‘인생은 구름과 같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왜구가 침입해오자 선조는 신의주로 몽진에 나선다. 왜구들은 사찰과 법당에까지 난입해 스님을 포박하고 보물을 침탈한다. 사명대사는 왜장이 던진 돌을 닭으로 변신시켜 받아내고, 대웅전에서 왜장과 담판을 한다. 왜구가 법당에서 칼을 들고 불상을 훼손하려하자 도력으로 칼을 부러뜨린다. 번번이 패한 왜구들은 ‘이 사찰에 머물지 말라’는 방을 붙여두고 퇴각한다. 사명대사는 국난의 시기에 중생을 보호하고 국가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구국항마의 기치로 승병을 조직하여 왜구에 대항한다. 

영화 ‘사명당’에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영웅 서사가 불교영화에 습합된 흔적이 역력하다. 1960년대 박정희 통치기에 양산된 국책영화의 영향이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 전파보다 구국의 일념으로 나서는 영웅의 성공담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룬다. 보련 스님도 영웅의 한 사람으로 의병에 참여했고 승병과 관군 그리고 명나라 군대는 왜구에 맞서서 평양성 탈환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사명대사는 승병의 지휘관으로 전승에 결정적 공훈을 세우지만 전투에서 보련 스님은 전사하고 만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요청으로 평화조약을 맺으러 일본으로 떠난다. 막부의 실세는 사명대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다양한 시험을 단계별로 시도한다. 사명대사는 첫 관문인 무희들의 유혹을 일거에 물리치고 온천욕장에서 활로 습격한 두 번째 관문 역시 변신술로 위기를 피한다. 세 번째로 처소에 장작불을 과도하게 지펴서 불태우려하지만 설(雪)자와 상(霜)자를 붙여서 화기를 막아내고 냉기를 방안에 돌게 하여 위기에서 벗어난다. 마지막 관문은 복도에 비수를 박아서 그 위를 걷게 하는 시험이다. 사명대사는 평평한 평지를 걷듯이 평상심으로 통과한다. 

모든 관문에 통과한 사명대사는 평화조약을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체결을 이끌어낸다. 그 조건은 조선을 침략한 군대에 대한 처벌, 피해 입힌 재산에 대한 배상과 포로들의 석방, 그리고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서약 체결 등이다. 

이를 통해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시기에 의병으로 항거해 승전을 거두고 외교적 노력으로 평화를 이끌어낸 영웅으로 부각된다. 일본의 태도는 사명대사의 실제 행적을 근거로, 영화적 장면을 통해 영웅적 행위를 강화하는 매개로 여겨진다. 실제 ‘동사열전’에 사명대사는 갑진년(선조 37년 1604년)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고 기록돼 있다. 

‘사명당’은 1960년대 시점에서 역사에 기록된 실제 행적을 토대로, 왜구에 대항하는 과정을 잘 담아낸 대작영화다. 또한 스님이 주인공인 호국영웅 이야기이며 국책영화라는 그 시대의 흔적이 많이 묻어있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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