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㉚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⑨
60.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㉚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⑨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9.09.03 13:26
  • 호수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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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목탑 건립 주역 용수, 진평왕 딸 천명부인과 결혼하며 왕실 핵심 실력자 부상

9층목탑 건립의 총 책임자로 
용수와 용춘이 혼재돼 기록

용수는 나가르주나의 의역
용춘은 유교적 이념을 상징

3년 만에 아버지 폐위되며
사촌인 진평왕이 왕위 계승

3궁 관장 내성사신 된 뒤로
왕실 대표하며 눈부신 활약

​​​​​​​반란 진압 중 선덕여왕 사망
아들인 김춘추가 왕위 계승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때 왕의 군대가 머물렀던 경주 월성의 현재 전경.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때 왕의 군대가 머물렀던 경주 월성의 현재 전경.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의 9층목탑을 창건한 주역은 진골출신의 승려인 자장(慈藏), 신라 왕족 출신의 이찬 용수(龍樹), 그리고 백제의 장인 아비(阿非) 등 3인이었다. 그 가운데 자장이 승려로서 사상적・신앙적 측면에서 9층탑 조성의 필요성과 의의를 마련해준 역할을 담당했다면, 용수는 공사의 총책임자로서 인적・물적 자원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용수는 용춘(龍春)이라고도 불렸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진평왕 44년(622) 용수, 51년(629) 용춘, 선덕여왕 4년(635) 용수(또는 용춘), 태종무열왕 즉위년(654) 용춘(또는 용수) 등 뒤섞여 표기되고 있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용춘(또는 용수), 황룡사9층탑조에서는 용춘(혹은 용수) 등 용춘의 명칭을 앞에 표기하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른 시기에 용수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고, 더욱 신라시기의 금석문인 ‘황룡사 9층탑찰주본기’(872)와 ‘성주사 낭혜화상탑비’(890)에 모두 용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 원래의 이름은 용수였을 것으로 본다. 1989년에 발견되어 한때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는 용수와 용춘이 같은 사람이 아닌 형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역시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용수(龍樹)’는 인도의 대승불교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전하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250?)를 의역한 것인데, 신라인으로서 용수를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은 불교를 독실하게 신앙하는 가정의 출신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러나 뒤에 정치적으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이름을 용춘으로 바꾸었으며, 그 아들의 이름을 춘추(春秋)로 지으면서 선명하게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수는 25대 진지왕(舍輪, 또는 金輪, 576~579)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인 사륜(또는 금륜)은 인도의 이상적 제왕인 철륜성왕이나 금륜성왕에서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지왕이 3년 만에 폐위당함으로써 동륜(銅輪)의 아들인 사촌형제에게 왕위가 넘겨져 26대 진평왕이 되었다. 용수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신분인 성골(聖骨)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음 신분의 진골(眞骨)로 강등되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진흥왕의 두 아들 가운데 큰 아들인 동륜태자의 혈통인 26대 진평왕・27대 선덕여왕・28대 진덕여왕 계통은 성골, 둘째 아들인 25대 진지왕(사륜)의 혈통인 용수・29대 태종무열왕(춘추) 계통은 진골로 신라 왕실의 골품이 나누어진 것이다. 오늘날 신라 중고기의 신라 왕족이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는 의미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주장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용수는 진골 신분으로 강등되었다고 하지만,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함으로써 진평왕의 사위이면서 선덕여왕의 제부의 신분으로서 진평왕대와 선덕여왕대에 걸쳐 왕실의 핵심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서 계속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진평왕 44년(622) 2월 용수는 관등 제2위인 이찬으로서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어 궁정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내성은 뒷날 35대 경덕왕 18년(759) 일시 전중성(殿中省)으로 개칭된 바 있었다. 원래 사신(私臣)은 각 궁전의 장관으로서 처음 진평왕 7년(585)에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3곳에 각각 사신을 설치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통합관리케 한 것이다. 처음 대궁에는 대아찬 화문(和文), 양궁에는 아찬 수힐부(首肹夫), 사량궁에는 이찬 노지(弩知)를 각각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44년에 1인으로 3궁을 겸하여 관장케 하였으며, 관등은 금하(衿荷, 파진찬이나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로 규정하여 진골신분 출신만이 가능한 자리에 용수가 임명된 것이다. 이로써 용수가 내성사신으로서 왕궁인 대궁과 양궁・사량궁 등 3궁을 총괄하게 되었다는 것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대하여 왕실을 대표하는 실력자로 부상한 것을 의미한다.

원래 신라의 지배체제는 6부체제를 근간으로 한 것이어서 양부(탁부)・사량부(사탁부)・모량부(잠탁부)・본피부・한기부・습비부(사탁부) 등 6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공동의 명의로 시행케 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22대 지증왕대(500~514)부터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6부체제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양부와 사량부의 세력이 특히 강화되어 양부 소속의 국왕과 사량부 소속의 갈문왕에 의한 2부 연합의 지배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법흥왕 11년(524)에 수립된 울진 봉평비(蔚珍 鳳坪碑)에 의하면 23대 법흥왕대(514~540)는 탁부의 모즉지매금왕(牟卽知寐錦王, 법흥왕)과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立宗葛文王) 2인이 주도하는 지배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법흥왕은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삼맥부(彡麥夫)가 계승하였는데, 이가 바로 24대 진흥왕(540~576)이었다. 그리고 진흥왕의 뒤에는 큰 아들인 동륜태자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둘째 아들인 사륜이 왕위를 이어 25대 진지왕(576~579)이 되었다. 그런데 진지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폐위당하고, 왕위는 그 아들인 용수를 제치고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이 계승하였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가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그 아버지가 ‘여색에 빠져 음탕하고 정치가 혼란하였다’는 책임을 지고 폐위당하였다는 사실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 진평왕이 동륜태자와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 사이에서 출생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용수는 왕위계승 경쟁에서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에게 밀려났으나,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해 진평왕의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가 됨으로써 왕실의 핵심적 구성원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수와 천명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즉위 원년(654) 4월 이미 사망한 아버지 용수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용수를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용수는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문흥대왕으로 추봉하기 이전, 즉 생전에는 문흥갈문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26대 진평왕대에는 친동생 백반(伯飯)이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 국반(國飯)이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이 되었고, 국반의 딸이 뒷날 28대 진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또한 27대 선덕여왕대에는 용수가 문흥갈문왕이 되어 선덕여왕에 이은 제2인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아들 김춘추는 왕위를 계승하여 29대 태종무열왕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왕과 갈문왕의 관계는 양부와 사량부의 2부가 중심역할을 하는 지배체제에 대응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평왕 44년(622) 왕궁인 대궁과 양궁・사량궁을 통합 관리하는 내성사신으로 용수가 취임하였다는 것은 용수가 그때부터 왕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용수는 3궁을 겸장하는 내성사신이 된 이후부터 눈부신 활약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진평왕 51년(629) 8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 부자와 함께 출정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낭비성(娘臂城 충북 청주시 上黨山城)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선덕여왕 4년(635) 10월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함께 지방의 주(州)・현(縣)을 두루 돌며 위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수품은 다음해 정월에 상대등이 되어 동왕 14년(645) 11월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수품이 귀족세력의 대표자인 상대등이 되었다는 사실은 3궁의 관리, 즉 왕실을 관장하고 있던 용수와 함께 쌍두체제의 우두머리였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마침내 선덕여왕 14년(645) 3월 황룡사의 9층목탑을 건립할 때 용수는 감군(監君)으로서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동시에 수품은 그 해 11월 사망할 때까지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직책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9층목탑의 공사는 다음 해 마치게 되는데,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회복하고 고구려와 백제 두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염원으로 세워진 9층목탑을 완성시켜준 인물이 바로 용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9층목탑이 완성되기 앞서 선덕여왕 14년(645) 11월 수품의 후임자로 상대등에 오른 이찬 비담(毗曇)은 반여왕파 귀족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년 뒤인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염종(廉宗) 등과 함께 왕을 폐위시키려는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의하면, 다수의 귀족들이 가담한 대규모의 반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담 등의 반란군은 명활산(明活山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물러 대치하였는데, 두 진영의 공방이 10일이 지나도 결말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선덕여왕은 전투 중인 8일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사촌자매인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반란은 김유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17일 비담을 죽이고 진압하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고, 9족을 죽였다는 것을 보아 귀족세력 사이에 여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용수가 살았다면, 부왕인 진지왕이 사망한 해(576)를 감안할 때 70세를 훨씬 넘긴 고령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아마도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하고 곧 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덕여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아들 김춘추(603~ 661)가 이미 45세의 장년으로 대당외교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매제인 김유신의 눈부신 군사활동이 뒷받침함으로써 정치계 제일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03호 / 2019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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