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김천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상
31. 김천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상
  • 이숙희
  • 승인 2019.09.09 15:32
  • 호수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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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지에 항마촉지인 석불상 봉안
동쪽엔 철책 갇힌 비로자나불 1구

의상대사 제자 승전 스님 창건
임란 후 18세기 이전 폐사 추정
결실된 머리 새로 만들어 붙여
불상의 예스러움을 완전히 잃어
김천 갈항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후기, 높이 150㎝. ‘비로자나불상’하(영축산 법성사, 2017)
김천 갈항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후기, 높이 150㎝. ‘비로자나불상’하(영축산 법성사, 2017)

경상북도 김천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금릉군 남명 오봉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뒤편에는 금오산이 있는데, 이 금오산 서쪽 기슭에 갈항사(葛項寺) 절터가 위치하고 있다. 갈항사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통일신라 때 화엄법사 승전(勝詮)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권4 ‘승전촉루’조에 갈항사의 절 이름과 창건에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승전법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법장대사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웠다. 692년에 법장이 의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온 것으로 유명한 스님이다. 이 승전법사가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700년경에 갈항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개령현’조에도 ‘삼국유사’의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어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범우고’ ‘가람고’ 등에는 ‘갈항사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이후부터 18세기 이전 사이에 절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갈항사는 모두 밭으로 변하여 옛 절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절터에 남아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기(국보 제99호)는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금당지로 보이는 곳에 세워진 보호각 안에는 항마촉지인의 석불좌상(보물 제245호)이 봉안되어 있다. 보호각의 동쪽 편에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 1구가 전하는데 쇠창살로 만든 흉측한 철책 안에 갇혀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머리가 결실되었고, 대좌도 파손이 심해 하대석만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마멸이 진행되어 세부표현 역시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불상의 머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았는데 예스러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이며, 오른쪽 무릎에도 시멘트로 붙인 흔적이 심하게 남아 있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법의를 입었으며 어깨 위에서 팔목 위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크기의 띠주름이 표현되었다. 옷깃은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져 있다. 두 손은 일부 파손되었으나 지권인을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연화대좌도 마멸이 심하여 그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복련으로 구성된 원형의 하대석으로 보인다.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불신만 겨우 남아 있지만 어깨가 각이 진 네모난 모습이나 옷을 입은 방식, 옷주름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불상 중에는 불상의 머리만 파손되거나 도난당한 예들이 적지 않다. 이럴 경우 불상 머리를 무리하게 새로 만들어 붙이면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오히려 목이 없는 불상으로 그대로 보존한다면 우리의 지나간 상처와 역사를 전해주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예부터 불상의 머리나 얼굴, 손 등을 훼손하는 것은 오역죄에 해당되어 지옥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인 아비규환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도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04 / 2019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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