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아Q의 정신 승리
127. 아Q의 정신 승리
  • 김정빈
  • 승인 2019.09.09 16:40
  • 호수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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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 깡패에 맞는 고통의 원인도 내면서 찾다

중국의 현대문학 소설가 루쉰
그의 대표작인 ‘아Q정전’에서
중국인 비열, 몽매, 저속함 등
주인공 ‘아Q’ 통해 통렬한 비판
건달에게 늘 맞는 ‘아Q’ 처세법
사성제 가르침 다시 들여보게 해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중국 현대문학에서 소설가 루쉰(魯迅, 1881~1936)의 위상은 그이름 앞에 대(大) 자를 붙여 ‘대루쉰’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하다. 그 정도의 대소설가라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장편소설을 남겼을 법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단편소설 몇 편과 잡문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에세이를 여러 편 남겼을 뿐이다.

루쉰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편소설 ‘광인일기’와 함께 ‘아Q정전’이 유명하다. 특히 가장 널리 읽혀 온 ‘아Q정전’은 중국인들의 비열하고 저속하며 몽매하기 그지없는 심리를 충격적으로 묘파한 작품으로서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로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속으로 뜨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루쉰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고루한 인습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또는 얼마나 비굴한 민족인지를 주인공 아Q를 통해 고발한다. 또한 루쉰은 이 이야기를 통해 정치적인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중국인들의 의식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중국은 청(淸) 왕조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이 성공을 거둔 뒤였지만 그럼에도 중국인들의 의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민중에게 있어서 혁명의 성공은 청 왕조가 혁명 세력으로 대체된 것일 뿐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청 왕조 시절에도 중국인들은 몽매한 사람들이었고 혁명시대가 되었어도 중국 민중은 무력한 사람들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몽매함과 무력함을 깨닫지도 못했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인간의 전형으로서 루쉰이 창작한 인물 아Q를 루쉰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묘사한다. 작품에 따르면 “아Q는 전에도 잘 살았고, 견식도 높고, 그야말로 거의 완벽한 인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몇 군데 대머리 흉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아Q는 자신의 그런 볼썽사나운 외모에 울화를 일으켰으며, 누가 그 흉터를 건드리면 흉터가 새빨갛게 변했다. 아Q는 욕지거리를 해대었고, 힘이 약해보이는 상대에게는 때리려고 대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당하는 것은 아Q 쪽이었다.

그래서 그는 때리려고 대드는 걸 포기하고 흘겨보기만 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런 지 얼마 뒤에 미장이 건달패들이 그를 골려주려 했다. 그들은 아Q를 만나기만 하면 깜짝 놀라는 체하며 말했다.

“야! 반짝반짝한데!”
“여기 등잔불이 하나 있었군그래!”

그에 대해 아Q는 처음에는 “네 놈들이 감히…”라며 저항하려 했지만 자신이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금방 마음을 바꿨다. 그는 그 자신의 흉터가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Q가 저항을 않자 건달패들은 그를 담벼락에 너댓 번 쿵쿵 박아주고는 득의양양하게 가버렸다. 그러자 아Q는 모든 잘못이 자신의 무력함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때린 자들, 또는 그런 자들을 용인하는 이 세상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놈의 세상은 정말이지 돼먹지 않았어’라고 말한 다음 득의만만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른 바 ‘정신 승리법’이라 불리는 이런 아Q의 처세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고, 그의 대응법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누런 변발을 잡아챌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아Q, 이건 자식 같이 어린 놈이 늙은 아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자, 말해 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아Q는 두 손으로 자기 변발 밑둥을 움켜쥐고 고개를 꼬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너희는 버러지를 때리고 있는 거 맞다. 됐냐? 나는 버러지야. 이래도 안 놔줄 거야?”

그렇게까지 말해 주었는데도 건달패들은 아Q를 놔주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가서 대여섯 번 쿵쿵 머리를 박아주고는 버렸다. 그들은 아Q가 이번에는 단단히 혼쭐이 났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Q는 10초도 안 되어 자신이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냈다. ‘자신이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에서 ‘자신이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을 빼면 ‘첫번째’가 남는다. 그리고 장원(壯元)도 또한 첫 번째가 아니던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첫 번째 장원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 다음 아Q는 금새 기분이 좋아져서 선술집으로 가서 말다툼을 했다. 그러고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분이 좋아지자 토곡사(土谷祠)로 돌아와서는 아무 데나 자빠져서 잠이 들어버렸다.

그 뒤로도 아Q의 어리석은 여러 모습이 묘사되는데, 한 불제자로서 필자의 주목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아Q가 취한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다. 필자는 아Q의 정신 승리법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성제와 닮은 데가 있다고 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Q의 처세법과 부처님께서 설하신 고귀한 진리가 닮았다고 말하면 불제자들은 의혹을 일으키겠지만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부처님의 사성제에서 집성제는 생로병사 우비고뇌라는 인생 문제에 대한 진단에 해당된다. 부처님께서는 그 문제의 진단에 해당되는 집성제에서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제시하시는데, 십이연기의 핵심은 무명과 갈애와 노사이다. 바꿔 말해서 십이연기는 “어리석으면(무명) 욕망하고(갈애), 욕망하면 괴롭다(노사)”라는 삼연기(三緣起)로 축약할 수 있다. 이를 아Q의 경우에 대입해보자. 방금 아Q는 건달패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는데, 이는 괴로움에 해당된다. 그리고 집성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아Q 자신의 어리석음과 욕망이라고 말한다. 즉, 사성제는 문제의 원인을 타자(건달패)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아Q 자신에게서 찾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남의 탓을 하지 않고 문제를 자신에게서 해결하는 법,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고 이것이 잘 되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에 비해 얼핏 보기에는 이 방법을 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약하고 비굴한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써 이 비슷한 방법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Q의 정신 승리법이다.

아라한으로 가는 진짜 정신 승리법과, 아Q의 어리석은 정신 승리법.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비슷하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그 두 경우를 깊이 음미해보자. 나는 혹 아Q와 같은 방식으로 내 앞에 다가와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나는 사성제가 가르치는 바를 정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들여다보자.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04 / 2019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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