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2. ‘법성게’ 제30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기자명 해주 스님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도달하고 도달해도 출발한 자리

꿈 속에서 30역 돌아다녔지만
침상에서 결코 움직인 적 없어

수행으로 도달한 불세계가
바로 증분의 법성성기

근기에 따라 끊음 말하지만
그러나 본래 끊을 바가 없어

​​​​​​​번뇌가 본래 끊어진 것임을
아는 것을 끊음이라 이름붙여

‘법성게’의 마지막 제30구는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부처라 한다”라는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처음의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과 대응되고 있다. 법성이 원융하고 본래 적정한 경계를 ‘구래부동명위불’로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도달한 불세계가 바로 증분의 법성성기임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 “구래부동명위불”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점차로 다가가 보자.

①예부터(舊來)는 언제 부터인가? ②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은 어떤 상태인가? ③구래부동의 부처님(佛)은 어떤 분이신가? ④예부터 부처(舊來佛)라면 단혹 수행의 문제는 없는가? ⑤“구래부동명위불”이란 통틀어 어떤 경지인가?

의상 스님은 구래부동이란 구래성불(舊來成佛)이고, ‘화엄경’에서 설하는 십불(十佛)이 구래불이라고 단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다’란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 부처님[十佛]이니 ‘화엄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중략) 열째는 여의불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

어째서 열의 수로 설하는가?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일승법계도)

석가모니불과 관음지장보살상. 북악산 수미정사.

의상 스님이 인용해 보인 이 십불은 ‘이세간품’의 십불이다. 이 십불에 대한 인용과 그 설명은 잠깐 뒤로 미루기로 한다.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란 ‘나의 몸과 마음’인 법성이니, 법성신이 십불로 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계는 매우 깊고 난해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구래부동의 의미에 대하여 ‘법융기’에서는 ‘구래’란 위의 증분 가운데 ‘본래적(本來寂)’이고, ‘부동’이란 위의 증분가운데 ‘제법부동’이라고 하면서 꿈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30여 역(驛)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난 뒤에 비로소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있었던 줄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 30역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법성게’에서 30구를 펼친 것이다. 본래 움직인 일 없이 침상에 있었다는 것은, 처음의 ‘법(法)’자와 마지막의 ‘불(佛)’자가 한 자리이니,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30구를 지나서 다시 법성에 이른 것이다. 구래부동이 법성원융 제법부동으로서, 단지 법성 하나일 뿐 움직이지 않은 까닭이라는 것이다.(대기) (법융기)

이 “구래부동명위불”에 대해서 의상 스님은 다시 ‘구래성불’과 ‘단혹’의 두 가지 측면에서 자문자답을 시설하여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먼저 구래불이 증분의 십불이라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범부가 어째서 구래성불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의상 스님은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성불이라고 하지 않으며,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福智]를 이루어 마쳐야 그때부터 구래성불이라 한다고 단정하고 있다.

문) 얽매여 있는 중생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
답)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다.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라고 한다.(일승법계도)

이에 대하여 ‘진수기’는 번뇌에 묶인 중생이 만약 아직 닦음의 연을 일으키지 않은 때라면 구래성불이라 할 수 없으니, 오늘 발심(發心)하는 연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비로소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즉 오늘 발심하는 연을 기다려서 곁이 없이[無側] 일어나는 때에 비로소 예부터 이루어진 것이니, 필요로 함을 따라서 모두 하나를 얻는다는 것이다.

‘대기’도 이러한 문답을 시설한 의상 스님의 뜻에 대해서 다시 짚고 있다. 즉 질문은 ‘만약 열 부처님을 기준으로 하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님 아님이 없으나 오늘 우리들은 눈이 먼 범부이니 어떻게 곧 열 부처님일 수 있는가?’라는 뜻이고, 답은 ‘망정을 뛰어넘는 법은 망정을 돌이키면 바로 이것인 것이니(超情之法 反情卽是) 만약 망정을 돌이켜 보면 법계가 두렷이 밝아서 일체중생이 번뇌를 끊어 다하고 복덕과 지혜[福智]를 이루어 마치니 어찌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화엄경변상도 제48권 여래십신상해품 고려목판.

그러면 번뇌는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끊는다는 것인가? 이 점은 앞의 “파식망상필부득”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의상 스님은 단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답하고 있다.

문)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如虛空] 이와 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을 ‘끊었다’라 하지 않고, 이미 끊은 이후를 ‘예부터 끊었다[舊來斷]’라고 한다. 마치 꿈을 깸과 꿈을 꿈, 잠을 잠과 잠을 깸이 같지 않은 것과 같아서 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斷)과 끊지 않음 등을 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 그 일이다.(일승법계도)

이러한 단혹의 내용에 대하여 ‘삼대기’에서 자세히 풀이하고 있다. 먼저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다’라는 것은 세 찰나로 나누어서 끊을 바 장애를 구하는 것이니, 세 찰나가 다 지혜의 체(體) 아님이 없어서 장애를 끊을 수가 없다.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란 끊지 아니하되 끊기 때문이다.(진수기)

그래서 ‘도신장’에서는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겁 동안 닦으신 뜻이 옛적이 아니고 새롭게 얻음도 없으며, 또한 끊을 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끊으려는 것도 아니다. 번뇌가 본래 끊을 바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을 끊음이라고 이름 할 뿐이라고 한다.

또한 ‘만약 진실로 끊을 바가 없다면 어째서 미혹한 사람이 아직 얻지 못했으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면 끊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점에 대해 이 ‘십지경론’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세 때(三時) 중에서는 끊는 모습을 얻을 수 없으나 깨달은 이후에는 세 때에 걸림이 없으니, 도리가 끊음과 끊지 않음 중에 있지 않으나 단지 근기에 따라 끊음을 말하고, 근기에 따라 끊음을 말하나 또 끊을 바가 없다는 것이다.

‘허공과 같이 끊는다’란, 허공은 사물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끊는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이 바로 허공과 같이 끊음이 되고,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허공은 곁이 없는[無側] 뜻이기 때문에, 지혜와 장애의 체도 서로 곁이 없어 허공과 같이 끊을 뿐이다.(진기)

잠과 꿈의 예는 두 사람이 함께 한 침상에 있으면서 한 사람은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밤새 꿈을 꾼 비유로 ‘법융기’는 설명한다. 그래서 일체 중생이 오늘 발심하여 장애를 끊고 수행하여 증득한다고 해도 모든 법의 실상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니, 중생과 부처님이 이미 하나의 법성의 침상에 함께 있어서 비록 중생이라고 해도 모자라거나 남는 것이 없고 비록 모든 부처님이라고 해도 보태거나 뺄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번뇌가 본래 없으니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없으며, 그래서 번뇌가 본래 끊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단혹이다.(대기)
균여 스님은 본래 부처이고[本來是佛] 예부터 부처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단혹이고, 그 때가 비로소 구래단이라 한다.(원통기)

그러므로 ‘법계도주’에서도 ‘총수록’에 보이는‘ 법성게’ 30구의 꿈 비유를 인용하면서, 단지 법성 하나일 뿐이므로 구래부동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름으로 부처님을 나타낼 수 없으니 결국 조사관을 통하여 깨닫기를 권한다. 이어서 설잠 스님은 잠자코 있다가 “산 구름과 바다 달의 정취를 남김없이 설하였는데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부질없이 슬퍼하는구나”라고 애달아 경책한다. 아니 구래불의 불가설 경계를 말없는 침묵[良久]으로 설해 보이면서 ‘법성게’ 설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상 스님의 본분가풍은 장수가 전쟁을 통해 평정해서 얻은 평화가 아니라 ‘법성게과주’ 처음부터 아예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따라서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도달하고 도달해도 출발한 자리이다[行行本處 至至發處]’라고 설파한 의상 스님의 말씀이 널리 회자되어 온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04 / 2019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