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비구니회 위상제고 원동력은 소통
전국비구니회 위상제고 원동력은 소통
  • 법보
  • 승인 2019.09.23 11:36
  • 호수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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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회관 활용 높여
전법·교육도량 개방추진
본각 스님 통찰 돋보여

조계종 비구니 중 최초로 인가를 받은 선사는 법희 스님이다.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 스님으로부터 ‘묘리당’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받았다. 비구와 비구 사이에만 내려오던 선맥이 처음으로 비구니에게 전해진 역사적인 사건이다. 조계종 비구니 중 최초로 강맥을 이은 스님은 금룡 스님이다. 1922년 구하 스님 문하로 입실건당 하며 전강 받은 금룡 스님은 1958년 광우 스님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법을 전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봉암사에서 비구스님들의 결사(1947)가 있었다면 성주사에서는 비구니스님들의 결사가 있었다.(1951) 1910년대∼1950년대 사이 비구니 교단에도 선교의 두 기둥이 확고히 세워져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비구니스님들의 위법망구 정신은 1950년대의 조계종 정화불사에도 깃들어 있었다. 언 땅에 엎드려 있다가 폐렴에 걸려 입적한 월혜 스님, 뇌출혈을 일으켰던 서운 스님, 단식기도 중 쓰러졌음에도 병원 행을 거부했던 비구니스님들의 정신은 훗날 조계종 개혁불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화불사 속에 무너져가는 분규사찰을 수호하며 여법한 도량으로 변모시킨 장본인도 비구니스님이다. 

지금의 조계종이 구축되기까지 비구니 역할은 지대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평가는 받지 못했다. 대한불교 조계종이 출범(1962) 했지만 비구니의 중앙종무기관 진출이 사실상 차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총무원 부장에 비구니가 임명(문화부장)된 건 대한불교 조계종 출범 41년 후인 2003년이다.

돌이켜보면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모태인 우담바라회 창립(1968)은 절규였다. ‘비구니 위상은 비구니 스스로 세워야 한다’는 무언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2월 창립총회에는 50여명의 비구니가 참석했지만 5월의 제1회 임시총회에 250여명이 참여했다는 대목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다. 이후 전국비구니회로 개칭해 재창립(1980)됐고, 5년 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꿔(1985)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비구니스님들의 숙원이었던 전국비구니회관이 2002년 건립됐다. 

한 가지 상기해 보자. 그 이전까지 종단의 대소사와 비구니의 사회적 역할 담론을 나눌만한 공간이 있었는가? 비구니스님들에게 절실한 정책을 논의하고 수렴할 수 있는 회의장이 있었는가? 사회법과 밀접하게 연결된 종무행정을 실효성 있게 터득해 주는 비구니 전문교육장이 있었는가? 이 물음은 조계종 사부대중에게 향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국비구니회관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지역의 사찰은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전국비구니회관이 비구니스님들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국비구니회관 건립 17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상기의 물음은 유효하다. 다만 이 물음은 사부대중이 아닌 전국비구니회로 향한다. ‘소통의 창구요 광장인 전국비구니회관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으며, 이것은 전국비구니회의 역량과 맥이 닿는다. 

전국비구니회 12대 회장으로 선출된 본각 스님은 출마와 함께 의미 깊은 물음을 던진 바 있다. “한국의 비구니스님들이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땀 흘리는 것에 비해 우리가 기대하는 변화는 왜 이렇게 더딘 것일까요?” 우담바라회 창립 때 들려왔던 절규로 다가온다. 6000여명의 여성 수행자가 포진하고 있는 전국비구니회의 위상정립을 향한 발걸음은 광장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신임 회장 본각 스님은 적확하게 꿰뚫고 있다. 전국비구니회관을 수행·전법·교육 도량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라 공약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비구니회의 운영과 관련된 과정과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나아가 전국비구니회 조직 내 스님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식 기구도 구성하겠다고 했다. 이 공약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조계종의 한  중심축인 비구니의 위상이 올곧이 설 수 있다.

 

[1505호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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