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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편지와 엽서의 추억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꾹꾹 눌러쓴 옛 편지서 SNS에 없는 감성을 보다


고등학교 때 아버님께 쓴 전상서
첫 머리는 기체후일향만강 시작
출가후 티베트나 인도 순례길엔
나 자신에게 엽서 써 격려하기도

매일 홍수처럼 넘치는 SNS 시대
정성과 감성 담은 손편지 그리워
염려하는 어머니께 전상서 쓸 것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아버님 전상서! 조석으로 바람이 찬데 그간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신지요? 소자는 아버님의 염려덕분으로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

무슨 옛날 편지인가 하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객지 유학시절 가끔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편지 드리던 첫 구절이다. 그 무렵에는 소식을 거의 편지로 전하던 때라 격에 맞춰 글을 쓰지 않으면 ‘배우지 못한 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니 편지 첫머리의 ‘누구누구 전상서’와 ‘기체후일향만강’은 편지 좀 쓴다는 사람들의 기본옵션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한문시간이 즐거웠다. 고사성어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사자성어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역사 속을 종횡무진 여행하는 듯했다. 재밌고 관심을 갖다보니 자연스럽게 ‘명심보감’이나 ‘논어’ 등을 접하게 되었다. 이것을 한 번쯤 읽어 본 사람들은 안다. 거기에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구구절절한 글귀들이 많은지···. 좋은 글들을 자주 베껴 쓰다 보니 이걸 써먹질 못해 손이 근질근질 했다.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문들은 거의 세로글씨로 되어있다. 당시 친구들한테 멋들어진 세로글씨로 편지를 보내면 감탄과 부러움을 산 적이 많다. 요즘도 가끔 편지를 쓸 때면 한지에 붓으로 세로 글을 쓰는데 그때 쓰던 습관이다. 

나는 여행을 가면 하나의 작은 의식을 치른다. 나한테 엽서를 보내는 것이다. 그곳의 명승지나 성지의 사진이 담긴 엽서에 그때의 단상이나, 혹은 나한테 보내는 탁마나 격려의 내용들이다. 몇 해 전 티베트 순례를 갔을 때도 짬을 내어 엽서를 하나 부쳤다. 보통은 몇 주안에 도착을 하는데 이 엽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을 무렵에야 배달이 되었다. 엽서에는 웅장한 포탈라궁의 사진과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라는 글귀와 미소불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티베트에 사는 도반한테서 온 엽서처럼 반가웠다. 

“비구 동은이여, 그대 지금 간절한가?” 

인도 순례를 갔을 때 쓴 엽서이다. 발신인을 ‘붓다로부터’ 해서 마치 부처님께서 나한테 직접 글을 써서 경책을 하는 것처럼 한 적도 있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연하장을 주고받느라 야단들이다. 대부분 인쇄로 된 엽서들이지만 가끔 손 편지로 안부를 묻는 분들도 있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분이 곤지암에서 전통 가마에 도자기를 굽고 있는 지헌 김기철 선생님이시다. 도반의 소개로 알게 되어 교류를 하고 있는데 이 분은 꼭 손 편지로 연하장을 쓰신다. 만약 그 연하장을 받고 손 편지로 답장을 쓰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상종을 하지 않으신다. 수염이 허연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의 정성 가득한 편지를 받고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덕분에 잊고 지내던 연하장이란 걸 쓰게 되었다. 한지를 길게 펼쳐놓고 오랜만에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 후 천은사에 오셨을 때 말씀하시길 글이 멋져 책상 머리맡에 붙여두었다고 하셨다. 사실 조금은 억지스럽게 시작한 연하장 쓰기는 이제 연례행사가 되어 올해는 어떻게 쓸까 하고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님께서 나의 인생을 좀 더 넉넉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군대있을 때다. 연말이면 ‘따블백’에 가득 든 위문편지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중 여고생들한테 오는 위문편지가 단연 인기가 최고였는데 졸병들에겐 차례가 돌아오질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군인아저씨께 정성들여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 문득 요즘도 위문편지를 쓰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정보시대이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 안부 문자가 매일 홍수처럼 배달된다. 제대로 읽어 볼 틈도 없고 내용을 보면 그게 그거다. 빠르나 건조하다. 마음에 울림이 없다. 아마 먼 훗날에는 종이에 펜으로 쓰는 안부편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또박또박 편지를 쓰던 시절은 이제 기억 속에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쩌다 관광지에 가면 사람 키만한 ‘느린 우체통’이 있어 겨우 명맥을 이을 정도다. 

내겐 손 편지 보관함이 있다. 손으로 쓴 귀한 편지를 따로 보관해 두는 함이다. 인쇄로 온 엽서나 편지는 읽고는 바로 폐기한다. SNS여파로 점점 우체통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빨간 우체통을 구경하기도 힘든 날이 올 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유행가 가사이다. 이제 가을이다. 창밖에 달이 휘영청 밝고, 귀뚜라미가 구슬피 울어댄다. 올 가을에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잊고 있던 감성에 잉크를 듬뿍 찍어 편지를 한통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저녁에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고향집에서 홀로 계시며 자식들 걱정에 노심초사 하시는 어머니께 안부편지 한 통 써야겠다. 출가할 때 편지 한 통 남겨두고 온 이후 처음 쓰는 편지이다. 

“어머니 선덕화 보살님 보시옵소서. 그간 기체후일향만강 하신지요? 저는 보살님의 지극한 염려기도 덕분으로 수행자의 길을 잘 가고 있습니다. 오늘 문득 신문사에서 연재하는 편지에 대한 글을 쓰다가 학인시절 눈물을 글썽이며 배웠던 동산양개화상이 어머니를 떠나며 쓴 편지가 생각났습니다. 모든 출가자의 어머니와 자식 간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몸을 낳아 길러주시고 출가사문의 길까지 허락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가슴에 깊이 사무쳐 아려옵니다.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는 이 불효를 용서하시옵소서. 내 비록 당신의 몸 빌어 태어나 이렇게 가도 가도 끝없는 길 떠나있지만, 한시도 부처님의 은혜와 당신의 크신 사랑 잊은 적 없더이다. 홀로 가는 이 길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더 큰 가르침으로 회향하겠나이다. 어찌 당신만이 내 어머니가 될 수 있으리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 내 어머니라 여기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부모가 되기 위해 더 정진하며 불효의 눈물을 삼키겠나이다. 부디 부처님 말씀 등불삼아 어두운 길 밝혀 나가시고 내내 평안하시옵소서.”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505 / 2019년 9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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