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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자명 박사

얼마 전 거리에서 전단지를 받았다. 서툰 디자인의 전단에는 낯선 종교 이름과 함께 앞뒤로 빼곡하게 “지도 말씀”과 계율이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 “탐내는 마음을 버리자, 인색한 마음을 버리자, 편애하는 마음을 버리자….” 무척 소박한 계율이라 웃음이 나왔다. 부처나 예수의 말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말. 계율은 함께 살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리로 여겨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어느 종교나 대동소이하다. 

계율이 없는 종교는 없다. 특히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을 생각한다면, 계율의 문제는 다른 종교보다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저 이웃끼리 트러블 없이 잘 지내보자는 소박한 바람을 넘어선다. 조금만 파 보면 그 안에 부처가 깨달은 가르침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텐진 빠모는 계를 지키는 삶을 일러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처럼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무해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해악을 끼치지 않고 살면 우리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된다.”(‘텐진 빠모의 마음공부’ 94p) 깨달음과 상관없이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것은 가능하고, 그것은 주변에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어떤 형태로든 위협받지 않는 주변의 생명체들은 평화의 일가를 이룬다. 그러나 계의 언어는 소박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전제가 되는 조건이 있다.  

일묵 스님은 계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알아차림’임을 지적한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자각하고 있지 않으면 계율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하는 말이 궁극적으로 거짓말은 아닌지, 내가 하는 행동이 돌고 돌아 다른 생명체를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은 알아차림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해도 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 올바른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은 바른 견해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늠할 수 있다.

오계는 다섯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 있지만 다섯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바른 견해와 굳은 의지가 없는 이가 삶에서 그때그때 내리는 판단은 상황과 욕망에 따라 불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으며, 그 불균형을 변명하기 위해 말은 많아지고 거짓도 늘어가며 행위는 산만해진다. 당연히 계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해, 계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삶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계를 제대로 지키려면 궁극적으로 팔정도를 걸을 수밖에 없다.       

물론 때와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교조적으로 계율에 집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계율을 지키지 않은 이를 비난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부처는 늘 극단을 경계하라 했으니, 계율을 생각할 때도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넉넉함이 핑계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승묵 스님은 계를 지키는 것을 냉장고 문을 닫는 것에 비유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냉기가 스며나와 냉장고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계를 지키려는 마음이 그토록 빈틈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계율은 남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 낫지.”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심한데 왜 나한테만 그래.” 이런 마음은 냉장고 문에 빈틈을 만든다. 계는 타인을 판단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내 삶이 좀 더 충만하기 위해서. 꼭 종교인뿐이겠는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삶이 분리되지는 않았는지,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삶이 누덕누덕해지고 기우뚱거리지는 않는지, 스스로 계속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을 게을리 하다가는 어느 순간 남의 발등을, 남의 아픔을 밟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06호 / 2019년 10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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