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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봉은 자긍심’ 토대 위 법열 충만한 강남 대표 고찰 일굴 터

‘평범한 인생’ 거부하고 
‘산속 삶’ 결단 직후 출가

금강산 건봉사 향했지만
닿은 곳은 오대산 월정사 

365일 쉴틈없던 행자시절
“내 인생 가장 순수한 때”

수륙재,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핵심역할 한 장본인

몸·입·마음 청정 발원이
불교의식 ‘재’의 핵심

앉을 공간 없어 돌아가는
불자님들 보며 가슴아려

‘봉은사 비전’ 선포하며
성역화 대작불사 천명

원융무애·화쟁정신 기반
대중포용하며 불사 현실화

“이 땅 어디에 서 있어도
수행자는 수행자여야”

원명 스님은 세간에 회자된 계획보다 더 웅대한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을 것만 같다. 봉은사 대작불사가 회향하는 그날, 지금보다 더 격상된 ‘봉은 자긍심’이 도량에 가득 들어찰 것이다.
원명 스님은 세간에 회자된 계획보다 더 웅대한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을 것만 같다. 봉은사 대작불사가 회향하는 그날, 지금보다 더 격상된 ‘봉은 자긍심’이 도량에 가득 들어찰 것이다.

고려시대 찬란히 빛났던 법등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짓눌리며 그 빛을 점차 잃어갈 때 허응보우(虛應普愚,1515∼565) 스님이 출현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양종을 세우며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는 봉은사를, 교종(敎宗) 수사찰로는 봉선사를 지정(1550)하는 한편,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1552) 승과를 통해 배출된 대표 고승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이 이 절의 주지 소임을 보며 남긴 ‘봉은사기’를 통해 당시의 사격을 짐작할 수 있다.

‘아침마다 1만 밥솥에 밥을 짓고, 열흘 동안에 1백석의 벼를 찧는다.’

화엄경판을 간직해 온 봉은사 판전(版殿)에는 ‘화엄경’뿐 아니라 ‘금강경’ ‘유마경’ ‘아미타경’ ‘고왕경’ 등도 소장돼 있는데, 이는 봉은사가 선종사찰을 뛰어넘어 교종사찰로서의 위상도 굳건히 세워갔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한국전쟁, 조계종 정화불사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 봉은사는 점차 제 모습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1200년 전 신라시대 때 피어오른 법등만은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도 꺼지지 않았다. 서울 도심 최고의 선종 수사찰이라는 긍지가 도량에 늘 서려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운은 봉은사 사부대중의 가슴에서 샘솟았다. 20만명의 신도와 하루 평균 외국인 방문객 300여명을 오롯이 품을 수 있는 대가람 조성 원력이 담긴 ‘봉은사 성역화 중창불사’에서도 그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강남 땅에 깨침의 소리를 전하는 종각.

도시공원으로 지정(1971)된 봉은사는 도시공원법과 문화재보호법이라는 이중규제로 인해 요사채는 물론 해우소 등의 기본적인 편의시설도 마음대로 짓지 못했다. 그런데 2015년 7월 새로운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도량에 깃들었다. ‘봉은사 역사공원 조성 마스터플랜’이 두 위원회의 심의를 최종 통과한 것이다. 때마침 신임 주지로 임명(2015.10) 된 원명(元明) 스님은 2016년 새해벽두 봉은사 비전을 제시하며 봉은사 성역화 중창불사에 박차를 가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 비전은 전각이 하나둘씩 들어서며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원명 스님은 늘 “봉은사 신도님들의 정성으로 이룬 불사”라 한다. 그러나 원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중을 포용하는 원융무애 정신과 큰 품의 소유자가 진두지휘해야 이룰 수 있는 대작불사다. 원명 스님 가슴 깊이 박힌 화해·회통을 잉태시킨 원천이 궁금해 봉은사로 향했다.

10대 중반의 소년은 지도를 펼쳤다. 깊은 산 속에 절 하나 있는데 마을과도 꽤 멀어 보였다.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였다.

“저 곳에서 살자!”

돈 3만원 들고 집을 나섰다.

신심이 발현돼 떠난 길이 아니다. 출가 권유가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다. 굳이 이유 하나를 들자면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는 ‘산 속에 파묻혀 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떠난 길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닿은 곳은 간성의 건봉사 포교당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법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건봉사에서 살아보려 왔습니다.”
“그 절은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 건봉사 가는 길은 닫혀 있다.”  

송강리~건봉사간(군도 2호선) 6.4km 구간이 군 검문 없이 완전 개통된 건 2018년 9월이다.

법사는 소년에게 1만원을 주며 권유했다.

“월정사로 가거라!”

한여름 홍성에서 시작된 여정은 금강산이 아닌 오대산에 닿았다.(1974) 그냥 떠난 길이 아니다. 숙연이다. 법의(法衣)는 다생에 연이은 원력의 거듭됨과 훈습된 지혜종자가 성숙되어 얻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깊은 산에도 꽃향기가 퍼질 즈음이면 월정사에서는 한암 스님 탄생을 기념하며 수계법회를 봉행한다. 입산 후 해를 넘긴 행자는 자신도 사미계를 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직 어려서 안 된다. 내년 봄 받아라.” 

상원사에서 입승을 보고 있던 대허 스님이 시큰둥해 있던 행자를 보고는 일렀다.

“나하고 상원사로 가자!”

‘봉은사 판전’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5호로 지정됐다.
‘봉은사 판전’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5호로 지정됐다.

새벽예불을 마치면 곧장 적멸보궁으로 달려가 108배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면 얼른 내려와 밥도 지었다. 무쇠 솥 안의 쌀이 거의 다 익어갈 때 장작불을 빼야만 타지 않았는데, 행자는 부뚜막에 올라가 냄새를 맡아가며 기가 막히게 그 순간을 짚어냈다. 상원사 범종 치는 일도 행자 몫이었다. 밥알 하나라도 떨어트리면 “쌀 한 톨에 시주님의 은혜가 일곱 근이다”는 꾸중을 들으며 주워 먹어야 했다. 1년 365일 동안 쉴 틈이 없었던 행자시절이었지만 원명 스님은 “내 생애 가장 순수했던 한 때였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상원사에서 1년을 보낸 원명 스님은 이듬해 봄 사미계를 받았다.(1976) 해인사와 범어사에서 강원 과정을 마친 원명 스님은 용주사, 불국사, 봉암사, 통도사 등의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시행된 도로명·주소 전면도입으로 산사에서 유래한 지명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삼화사에서 비롯된 ‘삼화동’도 무릉계곡의 이름을 딴 ‘무릉로’로 바뀌었다. 당시 삼화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원명 스님은 관련 부처에 강력하게 항의한 후 교회를 포함한 지역주민을 일일이 설득해 80% 이상의 동의를 받아 바뀐 ‘무릉로’를 기어코 ‘삼화로’로 돌려놓았다.

무형문화재에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시·도지정 무형문화재가 있다. 수륙재(水陸齋)를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장본인이 원명 스님이다. 더욱이 2000년 전후까지만 해도 범패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은 조계종의 정서를 감안하면 원명 스님의 안목은 놀랍다. 

원명 스님이 낸 차향이 다래헌에 퍼져갈 즈음 수륙재에 관심을 가진 연유를 여쭈었다.

“그 보물은 궤짝에서 끌어올렸습니다!”

주지 임명을 받고 삼화사에 당도하니 자물통으로 채워진 궤짝 하나가 주지실 한 귀퉁이에 놓여있었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난생 처음 가져보는 큰 호기심에도 열쇠가 없어 열어 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주지가 열지 못하면 누가 연단 말인가!’ 하고는 공구를 가져와 자물통을 해체하고 궤짝 문을 열어젖혔다. ‘화엄경’ ‘법화경’ 등 50여 권의 경전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낯선 두 권의 책자가 원명 스님 손에 쥐어졌다.

표제는 ‘중례문(中禮文)’이었고 내지 첫 면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로 되어있었다. 조사 결과 하나는 ‘덕주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강원도 유형문화재 156호), 또 하나는 ‘갑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강원도 문화재자료 150호)였다.

‘삼화사국행수륙대재보존회’를 결성(2001) 하고 신도들과 함께 연구하며 해마다 수륙재를 시현했다. 10여년의 각고 끝에 삼화사국행수륙대재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5호로 지정됐고, 삼화사국행수륙대재보존회 또한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2013) 삼화사에 수륙재가 있다면 봉은사에는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가 있다. 학계에 따르면 봉은사에서는 왕실의 지원으로 조선시대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생전예수재가 설행됐다고 한다. 원명 스님은 봉은사 주지 취임 직후 사단법인 ‘봉은사생전예수재보존회’를 설립(2016)해 전통의례 연구와 함께 전통 그대로의 생전예수재를 매년 설행했다. 

“망자를 위한 수륙재와는 달리 생전예수재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재입니다. 죽음 이후 업에 따른 심판이 주된 내용입니다. 생전예수재를 통해 새겨야 할 건 선인선과, 악인악과, 권선징악입니다. 불자가 아니어도 자기 성찰의 의미를 일깨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월 생전예수재를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지정까지 올려놓았다. 봉은사 생전예수재보존회는 2019년 9월27일 서울시무형문화재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 불교 대표의례인 수륙재와 생전예수재를 국가·서울시 무형문화재 반열에 올려놓은 원명 스님이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절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은 통찰이 빚어낸 결실이다.

“재(齋)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수륙재와 생전예수재에서 시현되는 예술적 특성을 감상하는 것도 의미 있습니다. 그러나 불자라면 그 자리에서 몸과 입, 생각을 맑게 하여 악업을 짓지 않겠다고 발원 하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불교의례에 깃든 깊은 의미를 들여다봐 달라는 당부일 터다.  

원명 스님은 봉은사 주지 취임 후 산문을 밤 12시까지 활짝 열고 불을 밝혔다. 도심 속 봉은사가 천년 동안 품어온 한밤의 산사미가 별처럼 빛났다. 

“봉은사 대중은 활기 가득한 봉은사를 소망해 왔습니다. 또한 도심 한가운데서 쉼표 하나를 찍을 수 있는 ‘쉼터 공간’으로써의 도량도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헤아려 현실화시키는데 역점을 두며 종무행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봉은사 야경.

수행도량으로서의 품격도 잊지 않는다. 기존의 봉은선원·불교대학과 함께 불교전문대학원을 설립해 불교학과와 선학과를 신설했다. 체계적인 참선교육을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자비수참 철야기도, 대웅전과 법왕루 등에서의 사분정근을 비롯한 전각별 기도도 봉행하고 있다. 

“목탁소리가 잦아들수록 전법의 힘이 약해진다는 건 2500여년의 불교역사가 증명합니다. 절의 중심축은 수행과 기도여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돌이켜보면 원명 스님 취임과 함께 상서로운 일들이 많았다. 미국 경매에 나온 ‘봉은사 시왕도’ 60년만의 귀환, 양주 석굴암에 서있던 일주문 35년만의 환지본처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봉은사 판전’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5호로 지정됐다. 건축불사도 차곡차곡 추진되고 있다. 답보 상태에 놓여있던 ‘미륵대불 원불 봉안’ 불사를 40년 만에 회향했다.(2019) 전통문화체험관, 신종루, 템플스테이 체험관이 준공됐고, 운하당, 매화당, 서래각이 2019년 안으로 완공될 예정이다.

“주지로 부임했을 때 가슴이 아렸습니다. 초하루 법회 때는 평균 2500명의 신도님들이 참석하십니다. 대중법회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은 대웅전과 법왕루, 보우당 정도인데 모두 합해도 1000여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습니다. 1500여명은 야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법회 도중에도 자리를 뜨는 분이 꽤 많았습니다. ‘절에 왔다가 법회도 다 못보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다니!’ 다른 불사는 제쳐두고라도 신도님들이 머물 공간만은 최대한 확보하자고 작심했습니다.” 

성역화 불사를 추진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작불사가 진행되면 시비가 일고, 지자체 등과의 갈등이 빚어지며 불사가 답보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묘하게도 원명 스님이 머물고 있는 봉은사에서는 별다른 마찰음이 들리지 않는다. 

“봉은사 주지 임명을 받고 대웅전 참배를 하며 ‘봉은사는 번창 할 절’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부처님 상호에 큰 복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단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봉은사 변모의 원동력은 부처님 가피라는 뜻일 터다. 그렇다 해도 봉은사와 지자체, 대중을 품어온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풀리지 않는다. 하여, 지침으로 삼고 있는 ‘한 마디’를 여쭈어 보았다. 원명 스님은 영축총림 통도사 보광선원 정진 시절 포행 중에 와 닿았던 달마대사의 ‘혈맥론(血脈論)’ 한 구절을 전했다.

‘밖으로는 모든 인연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을 없애라.(外息諸緣 內心無喘). 장벽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어야, 도에 들었다고 하리라.(心如墻壁 可以入道)’

강원에서 들었던 한마디, 제방 선원에서 ‘이뭣고’ 화두를 들며 정진하던 중 영롱하게 빛났던 것이리라. 원명 스님만의 원융무애·화쟁정신도 저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됐음을 알겠다. 

“수행자는 이 땅 어디에 서 있어도 수행자이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수행이어야 한다는 뜻일 터다. 봉은사 성역화 불사에도 수행자의 기품이 배어갈 것이다. 아마도 원명 스님은 세간에 회자된 계획보다 더 웅대한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을 것만 같다. 봉은사 대작불사가 회향하는 그날, 지금보다 더 격상된 ‘봉은 자긍심’이 도량에 가득 들어찰 것이다. 강북의 조계사와 함께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강남의 봉은사로 또 한 번 비약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날을 기다린다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이 샘솟는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원명 스님은

-  1974년 능혜 스님 은사로 출가.
-  1979년 범어사에서 구족계 수지.
-  용주사, 불국사, 봉암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
-  1996년 미륵사 주지.
-  1997∼1998년 백운사 주지.
-  2000∼2014년 삼화사 주지.
-  2013∼2014년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  2014∼2015 조계사 주지.
-  2015∼현재 봉은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다.

 

 

[1506호 / 2019년 10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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