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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경(眼鏡)과 심경(心鏡)  ①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말과 생각, 색안경 끼고 말하는 건 아닌지”

열반경 ‘장님 코끼리 만지기’편엔
장애인들 저마다 만진 부분으로
코끼리 전부인양 설명하고 있어
사람들 말도 이와 다르지 않아
​​​​​​​
한번쯤 눈 감고 심안으로 보기를
눈가린 안경 벗고 심경 열렸으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어떤 만남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만남은 차라리 안 만나는 것보다 못한 잘못된 만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만남에는 우연 혹은 어떤 기연이 함께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우연의 합(合)이 모여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삶이나 깨달음의 순간으로 화현하는 것이리라. 

홍대용(洪大容)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1765년 겨울부터 1766년 봄까지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을 다녀온 기록이 ‘건정동필담(乾淨洞筆談)’인데 ‘항전척독(抗傳尺牘)’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 안경으로 인한 중국 선비와의 아름다운 교유의 이야기가 쓰여 있어 이채롭다.

사신단 일행으로 참여한 비장 이기성이 원시경(遠視鏡 : 안경)을 사기 위해 유리창(琉璃廠)에 갔다. 그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중국 선비를 만나는데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용모가 단정해서 문인으로서 기품이 보였다. 이기성이 이들에게 “제가 아는 사람이 안경을 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거리에서 파는 것은 진품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대가 끼고 있는 안경은 아마도 진품일테니 제게 파시지요? 그대는 여분으로 하나 더 가지고 계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진품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까?”하고 말하자, 한 사람이 자기 안경을 선뜻 벗어주면서 그대의 지인은 자신과 비슷한 눈병이 걸린 사람일터이니 그 안경을 그냥 주겠다고 했다. 값을 치르려 해도 한사코 사양하는지라 그냥 헤어졌다.

중국 선비는 원래 절강지역 사람인데 과거시험을 보려고 연경에 와 있었으며 정양문 밖 건정동 골목에서 잠시 집을 얻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사신들이 묵는 숙소로 돌아온 이기성은 홍대용을 찾아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종이(화선지)를 빌려 선비들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홍대용에게 그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권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홍대용은 바로 그들을 찾아가서 필담으로 교유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이다. 머나먼 중국 강남 항주의 선비와 조선의 홍대용이 시공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교유를 이어간 ‘향전척독’이란 책은 바로 안경을 둘러싼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안은 안경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안경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가 없는 처지이다. 그러니 ‘안경, 그 안과 밖의 시선’이란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겨우 선글라스에 대한 추억의 글을 써 보았는데 어김없이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라도 써야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옳다고 혹은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리켜 관견(管見) 혹은 사견(邪見)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를 통해 정견(正見)과 혜안(慧眼)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반경’의 ‘맹인모상(盲人摸象)’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고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옛날 한 왕이 신하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코끼리를 불러다 장님들에게 만져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각자에게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보게 하였다. 먼저 이빨(상아)을 만져본 이는 “코끼리는 무처럼 생겼습니다”라고 하였고 귀를 만져본 이는 “코끼리는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발을 만져본 이는 “제가 보기에는 큰 돌절구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했고 등을 만져본 이는 “거대한 항아리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꼬리를 만져본 이는 “다 틀렸습니다. 코끼리는 굵은 밧줄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두 틀린 말을 하면서도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옥신각신 다투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말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색안경을 하나씩 쓰고는 세상이 붉고 노랗고 파랗고 희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이제 그 색안경을 벗어버린 채 청정한 본래면목을 바로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지혜의 눈이라는 ‘제 3의 눈’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읽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집인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책을 다시 읽어본다. 서화담(서경덕)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서 있는 사람을 만났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저는 다섯 살 때에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더없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어슷비슷 같아 보여 저희 집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에 갈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 사람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닌 것이다. 색깔과 모양에 휘둘려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 이것이 곧 망상이 된 까닭이다. 그러니 눈을 떴으면 더 잘 보고 찾아가야 할 터인데 도리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분별과 망상을 쉬어야 비로소 본래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음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한번쯤 눈을 감고는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을 가리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이제는 마음의 거울(心鏡)로 나와 너 세상과 자연을 바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진리 아님이 없으리라.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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