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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김진광의 ‘나무의 귀’

기자명 신현득

아낌없이 주는 초록식물 보살행
그중에 으뜸인 나무의 보시 노래

새들에 파라솔처럼 그늘 주고
앉아서 마음껏 수다떨게 배려
수많은 나뭇잎 귀를 팔랑이며
수다를 들어주는 것도 보살행

불자들이 수행해야 할 바라밀 중에서도 보시가 으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섯 바라밀(六波羅蜜)에서 보시를 앞세우셨다. 보시는 내가 지닌 것을 조건 없이 남에게 베풀라는 가르침이다. 보시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시를 가장 잘 지키고 있는 것이 초록식물이며, 그 중에서도 나무다. 

초록식물은 자기 몸을 먹이로 주어 동물을 먹여 살린다. 나무는 잎을 먹이고, 풀은 싹을 먹인다. 몸이 잘리고 뜯기는 고통이 있어도 “괜찮아, 먹어 먹어”하며 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록식물은 아낌없이 주는 보살이다. 초록식물의 보살행으로 동물이 살아간다. 식물 없이는 동물이 살 수 없다. 

나무는 새들의 집이 되고, 놀이터가 돼 준다. 열매를 익혀서 새들의 먹이로 제공한다. 자기가 이룬 거지만 자기가 가지지 않는다. 나무는 베풀기만 하는 보살이다.     

이 나무 보살이 보살의 귀를 갖고 있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나무에게 왜 귀가 있어야 할까?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명작 동시 한 편을 살피면서 생각해 보자. 

나무의 귀 / 김진광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새들의 수다를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수많은 나무의 귀가 있기 때문이지. 

같은 말 하고 또 해도 언제나
숲속 나무는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팔랑거리며 재미있게 잘 들어주지.
어찌 친구인 새들의 마음을 모르겠니? 

가을이면 이야기로 가득 찬 무거운 귀를 내려놓고
봄이 올 때쯤 연두 빛 새 귀를 가지에 매달지.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파라솔과 나무의자가 놓여있기 때문이지. 
여기 앉아서 맘껏 이야기해.
내 다, 들어줄게, 하는 나무의 마음 때문이지. 

김진광 동시집 ‘하느님, 참 힘드시겠다’(2019)

나무에 앉아 노는 새가 한두 종류가 아니다. 나무에 집을 짓는 새도 한두 종류가 아니다.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파라솔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기 때문이지.’ 이 표현은 시의 중심이며 번쩍이는 가귀(佳句)다.

나무는 새들에게 파라솔 같은 그늘을 드리운다. 나뭇가지는 새들의 의자다. 새들은 그 파라솔 그늘에서 그 나무의자에 앉아 마음껏 지껄이며 수다를 떨어도 된다.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새들의 수다는 같은 말의 되풀이다. 그래도 나무는 수많은 나뭇잎 귀를 팔랑거리며 새들의 수다를 재미있게 들어주고 있다. “맘껏 이야기해. 내 다 들어줄게…” 한다. 나무가 보살이기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은 나무를 괴롭힌다. 가을이면 나무 보살의 귀를 낙엽이란 이름으로 땅에 내려놓아야 한다. 시인은 이를 ‘이야기로 가득 찬 무거운 귀를 내려놓는다’고 표현했다. 재미와 시적 무게를 느끼게 한다.   

겨울 동안 나무 보살은 귀가 없다. 그러나 나무는 보살의 신통력으로 날짜를 세어 찬바람, 눈서리를 느낄 것이다. 봄이 오면, 수많은 연두빛깔 새로운 보살 귀를 가지에 다는 걸 보면.

시의 작자 김진광(金振光) 시인은 삼척 출생(1961)으로, ‘소년’지(1978)와 ‘월간문학’(1982)에 동시 추천으로 등단, 동시동화문학상(1987), 강원 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동시집‘바람개비’(1984) 등과 평론집 ‘근대동시논평과 해설’ 등이 있다. 

신현득 아동문학가·시인 shinhd7028@hanmail.net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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