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㉜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⑪
62.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㉜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⑪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9.10.08 13:28
  • 호수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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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군사 원병 확약…김춘추, 뛰어난 외교술로 국제정세 변화

김춘추와 김유신의 활약
진덕여왕 즉위 정국주도

남북‧동서 나뉜 국제정세 
김춘추, 당과 협력 끌어내

당의 문물제도 받아들여
정치개혁‧문화변화 추구

당의 한자‧유교‧율령 도입
동아시아 공통 요소 수용

​​​​​​​불교 관련 연호 변경에서
유교표방 연호 변경 시작
사적 제20호 경주 무령왕릉.
사적 제20호 경주 무령왕릉.

28대 진덕여왕(647〜654)은 비담(毗曇)의 반란 중에 귀족세력들의 여왕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은 분위기에서 즉위하였다. 여왕에 대한 지지세력으로는 김춘추(603~661)와 김유신(595~673)이 대표적 인물인데, 이들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이자,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되는 특수한 관계였다. 이들은 진덕여왕 즉위 이후 귀족세력들의 완강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정국을 주도하여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다.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하여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을 담당하였던 반면, 김춘추는 대당외교에 주력하여 나당연합을 성공시켜서 마침내 삼국통일을 달성케 하였다. 

6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관계, 그리고 중국 대륙의 국제정세가 크게 변하였다. 우선 3국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한강 유역 전체를 점유하여 한반도의 중앙지대로 진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제동맹을 결렬시켜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와 백제의 양국을 모두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결하는 남북동맹을 이루어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고, 신라는 이에 대항하여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동서연합이 모색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의 정세가 변화하던 6세기 후반 이후는 중국 대륙에서도 오랜 동안 계속해 오던 남북조를 수(隋)가 통일하는 데 성공하고(589), 이어 당(唐)으로 교체되어(618) 대제국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북방의 초원지대에서는 돌궐(突厥)의 신흥세력이 일어나 수・당을 위협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이 돌궐과 연결하여 수・당에 대항하려 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이룬 백제는 바다 건너 왜(倭)와 통하고 있었다. 이렇게 남북으로 연결되는 고구려・돌궐・백제・왜에 대항하여 수・당과 신라의 동서연합이 모색되었다. 이 같은 남북연결세력 대 동서연합세력의 대립이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양대 진영을 대표하여 직접 대결한 것이 고구려와 수의 전쟁(598), 고구려와 당의 전쟁(645)이었다.

한편 고구려가 수・당과 혈투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여 신라를 위기에 몰았다. 특히 백제의 31대 의자왕(義慈王, 641~660)은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을 받고 있었는데 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하는 한편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급히 서둘렀다. 마침내 선덕여왕 11년(642) 7월 의자왕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이어 8월에는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党項城, 남양)을 빼앗아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라의 백제에 대한 일선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陜川)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라는 방어의 일선을 낙동강까지 후퇴시켜야 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김춘추가 적국인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는 외교적 모험을 결행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는 40세로서 국제적인 외교 무대의 첫 등장이었다. 당시에 고구려의 정권을 쥐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출병의 댓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별관(別館)에 억류되는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그와 특별한 관계였던 김유신이 1만의 결사대로 고구려에 진입함으로써 겨우 억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에 김춘추는 당으로 가서 동맹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당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먼저 백제를 정복한 뒤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본서기’권25, 고토쿠(孝德)천황 다이카(大化) 3년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즉위년(647) 신라의 상신(上臣) 대아찬 김춘추 등이 왜국에 사신으로 왔는데, 김춘추의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 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 뛰어난 외교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는 5년 전 적국인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냉대와 위협을 받고 돌아온 이후 친당정책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어 진덕여왕 2년(648) 당에 가서 당태종에게 우대를 받고 마침내 나당군사협정을 맺는데 성공하였는데, 그에 1년 앞서 적국인 백제와 동맹관계인 왜국에도 사신으로 갔었던 것을 보아 적국과 우방을 넘나드는 그의 대담하고 폭넓은 외교활동을 확인케 한다. 왜에 갈 때 김춘추의 관등이 5등인 대아찬으로 기록되어 있어 5년 전 고구려로 갈 때 이찬으로 표기된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나는데,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김춘추의 눈부신 외교활동은 김유신과 협력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외교와 군사 양면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김춘추의 외교활동은 진덕여왕 즉위 원년(647)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서 앞 임금인 선덕여왕을 문산관 종2품인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진덕여왕을 훈(勳) 종2품인 주국(柱國), 그리고 종1품 작위(爵位)인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케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으로부터의 책봉은 비록 형식적인 것이기는 하였지만, 즉위과정에서 일부 귀족세력의 반대로 어려운 처지였던 진덕여왕의 왕위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하였다는 점에서 왕권안정에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신라에서는 다음해 7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왕의 책봉에 감사하고, 동시에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일찍이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흥륜사 공사를 재개하면서 23년(536)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진흥왕은 개국(開國)・대창(大昌)에 이어 33년(572)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하면서 홍제(鴻濟)로 연호를 바꾸었다. 그리고 진평왕 6년(584)에는 황룡사 금당을 준공하면서 건복(建福)으로 바꾸었고, 선덕여왕 3년(634)에는 분황사를 준공하면서 인평(인평)으로 바꾸었던 것을 보아 연호의 변경이 대개 불교적인 사업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진덕여왕의 연호 변경은 불교적인 행사와 관련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당 태종의 정책을 수용하여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하던 정책의 제1차적인 표방이었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친당정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는데, 첫째는 신라와 당과의 군사동맹이었고, 둘째는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정치적인 개혁과 문화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의 침공이 더욱 치열해져 서쪽 변경의 성들이 계속 함락 당하는 상황에서 우선 시급한 것이 당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일이었다. 진덕여왕 2년(648) 3월에도 백제 장군 의직(義直)에게 신라 서쪽 변경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성을 함락 당하였다. 이에 신라는 황급히 봄과 겨울, 두 차례 당에 사신을 보내어 위기를 호소하였다. 그런데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김춘추가 셋째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에 가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2년(648)조와 ‘당서(唐書)’ 신라전에서는 그의 외교적 활약상을 비교적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당 태종은 “김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고 하는데, 김춘추는 우선 국학(國學, 國子監)에 가서 석전(釋奠, 학교에서 행하는 先聖과 先師의 제사)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여 태종의 허락을 받았으며, 또한 당 태종이 지은 온탕비(溫湯碑, 당 태종이 驪山 온천에 가서 지은 비명)와 진사비(晋祠碑, 당 태종이 산서성 태원현의 晋祠에 가서 지은 비명), 그리고 새로 편찬된 진서(晋書, 西晉과 東晋의 역사서)를 선물 받았다. 김춘추가 특히 국학을 참관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써 귀국 뒤의 유교적인 정치개혁 추진의 단서가 되었다. 당 태종은 사상적으로 유교・불교・도교 3교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씨(李氏) 성의 노자를 받드는 도교를 최상의 위치에 두었으나, 실제적으로 정치는 유교에 의거하고, 불교는 정치와 분리하여 종교와 철학으로써 발전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국립종합대학으로써 국자감을 설치하고 유학을 전공하는 국자학(國子學)・대학(大學)・사문학(四門學), 그리고 기술학을 전공하는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이른바 6학 분야를 교육케 하였다. 그리고 학사 1,200간을 짓고 학생 3260인을 모집하였는데, 고구려・백제・신라・고창・토번 등 주위의 나라 자제들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당 태종이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문화정책인데, 한자와 유교, 그리고 율령체제 등의 동아시아문화의 공통적인 요소가 김춘추에 의해 신라에서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이밖에도 신라의 예복(禮服)을 고치어 당의 장복제(章服制)를 따를 것을 청하자, 당 태종은 내전에서 진귀한 의복을 내어 춘추와 그 종자들에게 주었고, 또한 조칙으로 관작을 주어 김춘추에게는 문산관 정2품인 특진(特進), 그 아들 문왕에게는 무관직 종3품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김춘추는 귀국에 앞서 당 태종에게 요청하여 문왕을 숙위(宿衛)로 삼아 당에 머물게 함으로써 당과의 친선을 보증 받았다.

그런데 당에서의 김춘추의 눈부신 활약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외교적 성과는 당 태종과 맺은 군사동맹의 협정이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조에서는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백제의 침공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호소하고, 원병을 요청하여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의 출동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언급하는데 그치었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 문무왕 11년(671)조에서는 앞서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에게 당 태종이 약속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이 협정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玉帛)와 사람(子女)들은 나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나라에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 이 당 태종의 약속 내용을 언급한 문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 당 태종의 약속을 어긴 대당총관 설인귀(薛仁貴)에게 문무왕이 보낸 서신의 일부이다.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맺은 이 협정에 의해 나당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데, 평양 이남은 신라가 점유한다는 약속을 당측이 어김으로써 7〜8년간의 나당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07호 / 2019년 10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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