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붓다는 전지자인가
10. 붓다는 전지자인가
  • 마성 스님
  • 승인 2019.10.14 16:35
  • 호수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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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신이 아닌 인류의 영원한 스승일 뿐

자신 전지자라 칭한 적 없는 붓다
가장 먼저 진리 길 발견한 것 일뿐
붓다길 가르치는 스승임을 밝혀
진리 가르치는 유일한 스승 암시
붓다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사진은 스리랑카 불교유적 갈위하라 석불.법보신문 자료사진
붓다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사진은 스리랑카 불교유적 갈위하라 석불. 법보신문 자료사진

많은 불교도들은 붓다를 일체지자(一切知者) 혹은 전지자(全知者)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란 ‘모든 것을 다 아는 자’(the Omniscient One)라는 뜻이다. 만일 붓다를 전지자로 이해하게 되면 신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붓다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로 번역하는 빨리어 원어는 ‘삽반뉴(sabbaññu)’이다. 이 단어는 니까야에 몇 번 나오지만, 모두 당시의 외도들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붓다는 자신을 전지자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는 자신을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이다’고 주장했다. 왓차곳따라는 유행자가 붓다를 찾아와 사람들이 ‘붓다도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이다’고 부른다고 전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자이다”(MN.Ⅰ.482)고 말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자신을 ‘삽반뉴(一切知者)’라고 호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붓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길을 일으킨 자이고, 아직 생기지 않은 길을 생기게 한 자이고, 아직 설해지지 않은 길을 설한 자이고, 길을 아는 자이고, 길을 발견한 자이고, 길에 능숙한 자이다”(SN.Ⅲ.66)고 했다. 이른바 붓다는 일찍이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붓다는 “내가 그대들에게 길을 선언했다.” 또 “여래는 가르치는 사람일 뿐이다”고 말했다. 요컨대 붓다는 길을 가르치는 스승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붓다는 아지와까(ājīvaka) 유행자 우빠까(Upaka)에게 “나는 일체승자(sabbābhibhū)요, 일체지자(sabbavidū)이다.”(MN.Ⅰ.171)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다섯 고행자에게 법을 설하기 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체승자’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의 법을 극복했다는 뜻이고, ‘일체지자’란 삼계의 법과 출세간의 법을 다 알았다는 뜻이다. 이때의 ‘삽바위두(sabbavidū)’는 ‘모든 것을 아는 현명한 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전지전능한 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또 붓다는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MN.Ⅰ.171)고 분명히 말했다. 즉 자신이 진리를 가르치는 유일한 스승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다른 경(AN4:35)에서도 “도(道)와 도(道) 아님에 능숙하고,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번뇌가 없으신 분, 마지막 몸을 가지신 부처님이야말로 위대한 지혜를 가진 위대한 사람(mahāpurisa, 大人)이라 불린다”(AN.Ⅱ.37)고 했다.

한때 산자야(Sañjaya)라는 바라문이 “사문 고따마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며 완전한 지와 견을 공언할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했다”는 소문을 꼬살라국의 궁중에 퍼뜨렸다. 빠세나디 왕은 그것이 사실이냐고 붓다께 여쭈었다.

붓다는 “대왕이시여,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가 ‘한 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이라고 한 것은 하나의 전향을 가진 한 마음으로 과거·미래·현재를 모두 알거나 보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한 마음으로 과거의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전향하더라도 과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오직 한 부분만 알 수 있다.(MA.iii.357)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되고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상과 더불어 일어난다.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마음이 일어날 때, 특정 순간에 일어난 마음은 그 순간에 대상으로 하는 오직 그 대상만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와 다른 외도들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걸식할 때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을 알고 보는 자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으면, ‘내가 빈집으로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갔다’라는 운명론으로 변명했다.(MN.Ⅰ.519)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과거에 대해 질문하면 다른 질문으로 피해가고, 화제를 바꾸어버리고, 노여움과 성냄과 불만족을 드러내었다.(MN.Ⅱ.31)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아는 자(一切知者)’ 혹은 ‘모든 것을 보는 자(一切見者)’라는 단어는 니까야에서 외도들이 주장하던 내용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단어일 뿐이다. 또한 붓다는 모든 것을 안다는 자체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붓다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하는 것을 일체(sabbaṃ)라고 말했다. 이때의 일체란 우리 인간은 육근을 통해 육식을 인식하는 것이 앎의 전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앎에 있어서 절대로 여섯 가지를 동시에 보고 알 수 없다.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사라지는 순간이 너무 짧아서 동시에 행하는 것처럼 느낄 뿐, 절대로 한 순간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5분만 해보면 알 수 있다.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은 볼 때는 봄만이, 들을 때는 들음만이, 맛볼 때는 맛봄만이…. 이와 같이 매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를 아는 자’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일체를 동시에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집중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붓다를 비쉬누(Vishnu) 신의 화신(avatāra)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도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일 붓다를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으로 인정하게 되면 불교는 힌두교속에 습합되고 만다. 붓다는 인류의 영원한 스승일 뿐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08호 / 2019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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