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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강세황 ‘대흥사’

기자명 손태호

골짜기마다 즐비할 개성의 불우(佛宇) 답사를 꿈꾸다

조선 후기 문예총수 강세황 작품
방문 걸쇠·문살까지 꼼꼼히 표현
일점투시도법 사용해 공간감 표현
직접 찾아갈 수 없는 현실 아쉬워

강세황 作 ‘송도기행첩’ 중 ‘대흥사’, 종이에 담채, 33×53.3cm, 175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 作 ‘송도기행첩’ 중 ‘대흥사’, 종이에 담채, 33×53.3cm, 175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풍도 지나간 주말 모처럼 운동 삼아 김포 문수산을 찾았습니다. 김포 문수산은 그리 높지 않고 등산로가 잘 구비되어 가볍게 등산하기 좋은 산입니다. 문수산에는 조선 숙종 20년(1634)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문수산성이 산 전체를 감싸고 있어 성곽 위를 걷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산 아래로는 조강, 염하가 흐르며 그 건너로는 강화도, 동북쪽으로는 한강 넘어 고양시와 북한산이 시원하게 조망되어 풍광이 참 좋은 산입니다. 문수산에는 전통사찰인 문수사가 있고 이곳에 주석하셨던 조선 중기 고승 풍담대사(楓潭大師, 1592∼1665)의 탑과 비도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상부근의 장대에서 잠깐 쉬다가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북쪽으로 멀리 개성이 보이고 그 뒤로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마침 구름하나 없는 맑은 날씨라 안내도와 똑같이 개성의 모습이 아주 가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이곳을 왔으나 개성까지 보일지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터라 매우 놀라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아마 한강 이남에서는 유일하게 개성이 조망되는 장소일 것입니다. 정말 개성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멀리서 개성을 바라보니 개성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 생각나 오늘은 개성 그림 한 점을 감상해보고자 합니다. 힘찬 글씨로 ‘대흥사(大興寺)’라 적어놓아 개성의 대흥사 모습임을 알 수 있는데 화가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조선 후기 문예의 총수, 요새말로 ‘핵인싸’라 불릴만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입니다.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면 그림 상단에 바위로 산 정상부근을 진한 농먹으로 거친 바위를 묘사했습니다. 그 아래 부드러운 흙산이 노르스름한 빛깔(약초색·若草色)로 바림 후 검정과 녹색으로 여러 모양의 수목을 표현하였습니다. 번짐과 태점을 잘 활용하여 수목들을 다양하게 표현한 점은 화가의 기량이 매우 뛰어남을 보여줍니다. 그 앞으로 전각이 앞이 터진 ‘ㄷ’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각 중 왼쪽의 건물이 가장 크게 그렸는데 목조건축의 공포(栱包)가 여러 번 겹쳐 올라간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태로 조선 후기 전형적인 목조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푸른빛의 단청,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활주, 사분합문(四分閤門)과 격자모양의 문살, 서까래에 매달린 걸쇠, 출입 계단까지 매우 꼼꼼하게 표현했는데 이는 강세황이 직접 대흥사 법당을 보고 관찰했기에 세밀한 사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감상자가 어디인지 모를까봐 현판의 일부인 ‘大’를 보여주어 이곳이  주법당인 대웅전(大雄殿)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정면에는 툇마루가 딸린 요사체가 있습니다. 우측에는 벽이 뚫린 강당 형태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당에는 나무 몇 구루를 제외하고 넓은 편인데 앞쪽이 넓게 터진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실제 모양은 사다리꼴이 아닌 ‘ㄷ’자 모양이겠지만 앞이 넓은 사다리꼴 형태로 그린 점은 전통회화에서는 보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는 당시 서양화법 중 하나인 일점투시도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일점투시도법은 화가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멀리 있는 것은 작게, 앞에 있는 것은 크게 그리는 방법으로 중앙에 중심점을 잡고 그곳에 거리와 건물이 수렴하게 하는 원근법의 일종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요사채 뒤 마치 꼭지가 달린 것 같은 검은 바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사선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하다보니 앞으로 나올수록 넓어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법으로 사찰은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되고 실재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공중에서 떠서 바라보는 부감법을 사용하면서도 공중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대웅전 지붕아래 공포가 표현되어 다소 부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우측 건물의 지붕도 일점투시도법으로는 뒤와 앞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어야 하지만 거의 같은 넓이로 그려져 서양화법에만 의지하지 않고 전통기법을 혼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 하단으로 무게가 치우침이 마음에 걸렸던지 오른쪽 위 공간에 대흥사라는 힘찬 글씨를 적어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다색목판화 같은 색채감각, 윤각선 위주의 건물표현, 서양식 투시법의 활용 등으로 실경산수화의 새로운 감각과 변화가 돋보이는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은 그의 나이 45세 되던 1757년 7월에 당시 개성 유수였던 벗 오수채(吳遂采, 1692~ 1759)의 초청으로 함께 개성을 유람하여 총 16점의 그림을 그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남겼습니다. 당시 조선 후기 18세기 문인들 사이에는 유람문화와 기행사경의 풍조가 유행했던 시기라 이러한 화첩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강세황도 이러한 유행 속에서 기행사경을 그리면서 겸재 정선이 추구한 실제 모습보다는 마음의 담은 이미지가 강조된 겸재식 산수화풍이 대세인 시절에 산수화는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려야 한다는 실경산수를 강조하면서 당시 새로운 서양화풍을 실경산수에 적용하는 새로운 시도로 그린 화첩이 바로 ‘송도기행첩’입니다. 

대흥사는 개성시 박연리에 위치해 있는데 인근에 유명한 박연폭포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919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10월에 창건했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4년) 개성부 상산청에 “수보를 올라가면 대흥사라 하는데 지금은 옛터만 있으며, 절 위쪽에 여러 암자와 옛터가 있다. 이곳 옛터 가운데 태안(泰安)은 고려 태조의 태실이다”라는 기록으로 조선 초기에 한차례 폐사가 되었지만 원래 대흥사가 고려 태조 왕건의 태실을 관리하던 수호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성은 고려시대인 919년 수도가 되면서 고려시대 500년 동안 개경(開京), 황도(皇都), 황성(皇城), 경도(京都) 등으로 불리며 1396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기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의 수도에 얼마나 귀중한 사찰과 성보들이 있었겠습니까. 그 중 상당수가 전쟁과 숭유억불 속에 파괴되고 흩어졌겠지만 아직도 송악산, 천마산 골짜기마다 사찰과 절터가 즐비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곳이라 멀리서만 바라보거나, 그림으로만 개성의 모습을 더듬거리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루빨리 남북의 끊어진 길이 열리고 교류와 왕래가 활발히 이루어져 대흥사, 관음사에도 참배하고 박연폭포의 장쾌한 물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08호 / 2019년 10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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