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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1대 총무원장 진경 스님

종단제도 개혁에 강한 의지 보였지만 ‘신흥사 폭력사태’로 중도퇴진

1945년 9세 나이에 마곡사 출가
총무원 사회·감찰부장 등을 역임
1982년 3월, 21대 총무원장 선출
해외유학승 지원·징계자 사면 단행
불국사 등 직영 해제로 종단안정
대흥사 주지 문제로 종회와 갈등
신흥사 폭력사태로 강제 퇴진
1994년 개혁회의에 반발 ‘멸빈’

1982년 4월 조계사 봉축법요식에 참석한 총무원장 진경 스님(앞줄 가운데)과 원로의장 기종 스님(왼쪽), 의현 스님(오른쪽). 국가기록원
1982년 4월 조계사 봉축법요식에 참석한 총무원장 진경 스님(앞줄 가운데)과 원로의장 기종 스님(왼쪽), 의현 스님(오른쪽). 국가기록원

1982년 3월25일, 조계종 제20대 총무원장 법전 스님이 사퇴를 선언했다. ‘절구통 수좌’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정진력과 인욕이 몸에 밴 스님이었지만,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성수 스님의 불신임으로 시작된 1980년대 총무원장 수난사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1981년 1월 종헌개정으로 총무원장은 종단의 대표권과 종무행정의 실질적 책임자로서의 막강한 권한이 부여됐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종단운영을 두고 총무원장과 중앙종회는 번번이 대립했고, 그 결과는 늘 중앙종회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당시 종단권력의 중심이 중앙종회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렇기에 중앙종회를 아우를 수 있는 지도력과 두터운 지지그룹 없이는 누가 총무원장에 선출되더라도 오래갈 수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는 3월25일 법전 스님의 사표를 수리하고, 21대 총무원장으로 진경 스님을 선출했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중앙종회는 재적의원 34명 중 24명이 투표에 참가해 16표를 얻은 진경 스님을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녹원 스님이 3표, 의현‧능혜 스님이 각각 1표, 기권 3표였다. 앞서 중앙종회는 출석과반수의 득표를 얻은 스님을 당선자로 확정하되, 1차 투표에서 과반에 미달할 경우 2차 투표를 실시하고, 여기서도 미달일 경우 3차 투표를 실시해 다수 득표자를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했었다. 후보등록 절차 없이 진행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누구도 쉽게 과반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경 스님은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상회해 당선자로 확정됐다. 중앙종회의원 사이에서 진경 스님의 신뢰가 높았음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이 무렵 진경 스님은 의현 스님과 더불어 중앙종회를 이끄는 40대 중진그룹의 대표 주자로 꼽혔다. 총무원장이 바뀔 때마다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돼 온 인물이기도 했다.

1936년 9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아홉 살 되던 해인 1945년 일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해 4월 마곡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55년 마곡사에서 향덕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마곡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친 이후 국학대학(1971년 고려대에 흡수)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행정대학원도 수료했다.

내외전을 두루 익힌 탓에 스님은 일찌감치 종무행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65년 총무원 재정국장을 시작으로 동국학원 감사, 명성여중고교 교장, 총무원 사회부장, 감찰부장, 대한불교신문사 사장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6년 12월 제2대 중앙종회의원을 시작으로 3대, 5~7대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됐고, 1981년 9월에는 마곡사 주지에도 선출됐다. 진경 스님이 이날 중앙종회에서 큰 표차로 총무원장에 당선된 것도 이런 이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1982년 4월26일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된 총무원장 취임식에서 진경 스님은 “시대환경에 맞는 포교로 불교의 근대화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승가의 의식을 개선하고 종단 제도를 개혁해 불교를 쇄신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총무원장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 스님은 종단 안정과 변화를 위한 의욕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해 5월28일 ‘해외유학승에 대한 장학금지원’을 위한 종령 47호를 발표했다. 조계종 재적승 가운데 해외 불교대학이나 일반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하는 스님들을 선발해 학비 전액을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른 예산은 총무원 특별교육예산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이는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27법난’ 당시 치탈도첩(멸빈)됐거나 제적의 징계를 당한 스님들에 대해서도 사면을 단행했다. ‘동아일보(1982년 6월2일자)’에 따르면 조계종 호계위원회는 6월1일 10‧27법난 당시 ‘치탈도첩’ 됐던 성해, 현우, 원광, 현광, 정다운, 삼보, 정수 스님과 ‘제적’의 징계를 받았던 혜성, 지우, 법열, 자신 스님을 포함해 11명의 스님들에 대한 징계해제를 결의했다. 이로써 10‧27법난 과정에서 조계종 정화중흥회의로부터 징계를 받은 42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승적이 회복됐다. 호계위원회는 불국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한 것에 반발해 종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월서 스님에 대한 제적 징계도 해제했다. 이는 ‘종단 안정을 위해서는 화합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진경 스님의 종단운영 기조가 반영된 결과였다.

진경 스님의 종단 화합조치에 중앙종회도 호응했다. 중앙종회는 6월2일 제72회 임시회를 열어 불국사 등을 직영사찰에서 해제했다. 불국사와 신흥사를 교구본사로 복원했으며 낙산사와 석굴암도 교구말사로 환원시켰다. 불국사 주지 월서 스님도 이날 중앙종회에 나와 참회의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전임 총무원장들을 잇따라 낙마시키는 배경이 됐던 불국사 갈등은 마침내 수습됐다.

종단분규의 불씨가 사라지면서 조계종도 안정을 찾아갔다. 진경 스님은 이런 안정 분위기를 기반으로 종단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스님들의 교육과 의제 등 종단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선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를 위해 총무원 산하 종단제도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개혁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제도개혁위원회 ‘개혁방안보고서’의 일부 내용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경향신문(1982년 8월14일자)’에 따르면 종단제도개혁위원회의 ‘개혁방안보고서’에는 조계종 승려를 독신인 수도승과 결혼한 교화승으로 구분하는 내용이 담겼다. 수도승은 법계진급에 제한이 없고 중앙간부와 각 사찰 주지 등을 맡을 수 있지만, 결혼한 교화승은 취임금지 규정을 둔다는 것이었다. 출가한 이후 계율을 어겨 독신승으로 살 수 없는 스님들도 일정한 자격제한을 통해 합법적으로 종단구성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취지였지만, 논란의 소지는 다분했다. 언론보도로 조계종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개혁방안을 두고 “불교정화 이전으로 후퇴” “은처승을 합법화하는 조치” 등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다급해진 진경 스님은 8월16일 기자회견을 열어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수습에 나섰다. 스님은 “교화승에 한 해 대처육식을 허용한다는 안은 제도개혁위원회 차원에서 만든 시안에 불과하며 총무원은 이를 검토한 사실이 없다”면서 “청정비구 종단에서 승려의 결혼허용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진경 스님의 발 빠른 대응으로 논란은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일로 진경 스님이 추진했던 종단제도개혁안은 백지화됐으며 총무원장으로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급격히 흔들릴 수 있었던 논란을 조기에 수습하면서 진경 총무원장 체제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진경 스님은 1983년 1월 신년담화문을 발표하고 4년제 승가대학 설립, 종단복지 및 승풍 정화, 해외포교 강화 등을 주요사업 과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중앙종회의 견고한 뒷받침이 필요했다. 때문에 진경 스님은 1월17일 새 중앙종회의장을 선출하는 74차 임시중앙종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1983년 1월18일자)’에 따르면 중앙종회 새 의장을 두고 녹원 스님과 의현 스님이 경합했다. 의현 스님은 진경 스님과 오랜 도반으로 함께 중앙종회를 이끌어 온 각별한 사이였지만, 잠재적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진경 스님은 녹원 스님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심지어 총무원 규정부 한 간부는 의현 스님이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로 중앙종회의원들의 표심은 오히려 의현 스님에게 몰렸다. 이날 중앙종회는 새 의장 선출과 관련해 1차 투표에서 14대 15, 2차 투표에서 12대 16으로 의현 스님이 근소하게 녹원 스님을 앞질렀다. 2차 투표에서도 재적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녹원 스님은 후보 사퇴를 선언하고, 의현 스님을 새 종회의장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의현 스님은 만장일치로 새 종회의장에 선출됐다. 의현 스님이 종회의장에 선출되면서 총무원과 중앙종회 사이에서 난기류가 형성됐다. 비록 의현 스님이 “무조건 (총무원장과) 화해하고 종단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자신의 종회의장 선출을 막기 위해 폭력까지 행사한 총무원에 대한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진경 스님과 의현 스님의 감정 골이 깊어질수록 총무원과 중앙종회가 대립하는 빈도는 늘어갔다.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대립은 총무원장이 임명한 대흥사 주지 문제로 본격화됐다.

‘7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75차 임시회에서 이중승적 의혹 등이 제기된 대흥사 주지 해임을 결의했다. 이에 대해 진경 스님은 “이중 승적이 있다면 응분의 처리를 하겠다”면서도 “일단 본인을 불러 진술을 받고 완벽히 조사를 한 뒤 해임처리 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진경 스님으로서는 본사주지 임면권이 총무원장에게 있고, 구체적인 범계행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대흥사 주지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다툼으로 비화됐고, 그럴수록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날선 대립은 심화됐다.

이런 가운데 1983년 8월6일 신흥사에서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다. 총무원이 임명한 신흥사 주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신흥사 재적승과 신임 주지측간에 폭력사태가 발생, 스님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었다. 신흥사 폭력사태는 재정이 우량한 사찰을 차지하려는 스님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스님들 간의 ‘엽기적 폭력사태’는 언론보도를 통해 세간에 전파됐다. 따가운 비판이 종단 집행부로 집중됐다. 진경 스님은 언론에 참회문을 발표하고 관련자들을 엄중 징계하겠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들끓는 비판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세간의 비판이 커질수록 조계종의 위상은 한없이 실추됐다. 정부는 폭력사태를 이유로 신흥사의 재산관리권을 속초시장으로 이관했고, 종단 원로들을 불러 자체정화를 강하게 요구했다. 종단 내부에서도 젊은 학인스님들을 중심으로 집행부 총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진경 스님의 운신 폭은 시간이 갈수록 좁혀졌다.

중앙종회는 8월19일 78차 임시회를 열어 신흥사 폭력사태와 관련한 대책마련에 나섰다. 임시회에는 이번 사태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무원장과 종회의장이 동반 사퇴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진경 스님은 “일단 사태수습 방안을 마련한 뒤 총무원 집행부와 중앙종회의원 전원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되, 향후 3년간 일체의 공직에 취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총사퇴하자”고 제안했다. 3년간 공직 제한은 총무원 집행부와 중앙종회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종회의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결국 장시간 논의 끝에 중앙종회는 “총무원장과 종회의장의 사임을 결의하되, 신흥사 사태 수습을 위해 9월20일까지 수습기간을 두고, 수습이 되지 않더라도 사임키로 한다”고 결의했다. 종회의원 전원도 종회의장에게 사표를 맡기고, 1개월 뒤 중앙종회를 소집해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중앙종회의 결의에도 진경 스님은 “정화위원회를 구성해 사태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제도개혁을 단행한 이후 물러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실상 사퇴불가 선언이었다.

그러나 종단 집행부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학인스님들은 총무원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하며 총무원과 중앙종회를 압박했다. 결국 중앙종회는 9월3일 79회 임시회를 열어 진경 스님의 총무원장 사표 수리를 결의하고, 9월5일 회의를 속개해 △중앙종회 권한 원로회의에 이양 △현 집행부 간부 해임 △중앙종회 해산을 결의하고 폐회했다. 이로써 조계종은 비상종단체제로 돌입했다. 원로회의는 9월5일 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운영위원회 구성을 결의하고, 비상종단운영위원장 겸 총무원장으로 서운 스님을 선출했다.

그럼에도 진경 스님은 소송을 제기하며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계종은 진경 스님의 조계사 총무원과 비상종단의 봉은사 총무원으로 양분되며 대립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비상종단 측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문공부도 종단 대표권자를 진경 스님에서 종정 성철 스님으로 변경했다. 진경 스님으로서는 더 이상 지지해 줄 세력도 명분도 없었다. 결국 그해 12월1일 진경 스님은 비상종단 측에 업무인수인계를 단행하고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1982년 3월 중앙종회에서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지 1년 9개월여 만이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진경 스님은 8·9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된 데 이어 1987년 12월 동국학원 이사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9월 동국대 입시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진경 스님은 다시 물러나야 했다. 1994년에는 개혁회의 측을 상대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제기했다. 이 일로 스님은 멸빈의 징계를 받아 자신이 평생 몸담아왔던 조계종에서 빈척돼 야인의 삶을 살고 있다. 불운했던 진경 스님의 삶은 지난했던 현대조계종사가 남긴 상처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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