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품격 ‘정언(正言)’
언어의 품격 ‘정언(正言)’
  • 이창경 교수
  • 승인 2019.10.22 10:18
  • 호수 15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언서판이란 말이 있다. 전통적으로 인물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외모, 말, 글씨, 판단력 등이다. 여기서 말은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삼가고 신중한 태도, 배려를 통한 정서적 유대, 언행일치 등 말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말은 의사 소통의 도구이지만 그 전달 과정에서 심성과 교양이 드러나 결국 인품과 직결된다.

말은 일상생활에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왔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왔다. 불가에서는 구업(口業)을 짓지 말아야 함을 가르쳤다. 구업은 신‧구‧의 3업 가운데 하나다. 이치나 사리를 따지지 않고 선동하는 말,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거나 모욕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기묘하게 꾸며 합리화하는 말, 이것이 말로 짓는 구업이다. 바른 말, 의로운 말, 상처 주지 않는 말을 해야 하는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의 ‘논어’에도 삼복백규(三復白圭)라는 말이 나온다. 공자의 제자인 남용(南容)이 ‘깨끗한 흰 옥에 묻은 티끌은 깎아 낼 수 있지만, 한번 잘못한 말은 고칠 수 없다’라는 가르침을 매일 세 번씩 외우고 실천하자, 이런 사람이라면 정녕 믿을만하다 여겨 자신의 조카딸을 그의 처로 삼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개혁 정책과 탕평으로 대통합을 추진한 정조는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도 이 책의 언잠(言箴)이라는 글에서 “말이여, 말이여.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친분을 갖게 하기도 하고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니,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세상이 밝은 시대에는 선한 말에 사람이 따르지만 험난한 시대에는 추악한 말에 따른다”라 하여 말은 시대를 반영하고 있음을 말했다.

요즘 시대는 어떠한가. 국민대통합위원회 조사 결과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는 웹사이트 게시글 32%가 욕설이나 폄하 등 저속한 표현을 담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청소년들의 은어, 신조어 사용이 언어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에서도 리얼리티 쇼 형식의 오락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매체나 통신상에서 만들어지는 신조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지자체의 어느 공익광고 카피에도 행실이 형편없는 사람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인 ‘개’라는 말을 접두어로 쓰인 낱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도층에서의 막말 사용에 대한 논란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막말’을 치면 익히 알고 있는 정치인의 얼굴로 가득하다. SNS 댓글, 기사평에는 면전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욕설, 비난, 모독의 글이 난무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개인방송의 일부 진행자나 여기에 달리는 댓글들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친근한 사이라면 서로 용인된 가운데 가벼운 욕설은 친밀감을 표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감정을 자극하고 인격을 모멸하는 비속어의 사용은 스트레스 해소라는 심리적 기능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문제는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자신이 쓰고 있는 말이 왜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고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한 휴대폰 사용이 늘면서 가능한 짧고 강렬하게 표현하려는 욕구가 작용한 때문도 있다. 

자기표현이 중시되는 자유로운 시대, 속도가 우선인 미디어 환경에서 말의 규범으로 삼았던 불가의 정언(正言), 삼가고 조심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생각일까. 말이 지닌 힘과 그 말에 대한 반향을 생각하면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임에 분명하다. 나만 있고 너는 없는 거친 시대에 불교에서 말하는 구업의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할 때이다. 말의 품격은 정언에서 나온다. 소통과 통합도 정언이 출발점이다.

이창경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 ck56@shingu.ac.kr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