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의승군과 표충사
12.  의승군과 표충사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10.22 13:29
  • 호수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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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초 구하려 목탁 대신 칼 움켜쥔 의승군 자비심 깃들어

임진왜란으로 아비규환 백성보며
중생구제 보살행으로 전쟁터 나가
‘월계' ‘파계행' 비난에도 꿋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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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규명 받지 못한 승군 대부분
불교계가 먼저 재조명 나서야
임진왜란 당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등 삼대성사의 호국충혼이 살아있는 밀양 표충사는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1839년 월파선사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 절로 옮기면서 이름도 표충사(表忠寺)가 됐다.

한국불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고 아끼는 호국애민(護國愛民)이라는 독특한 불교관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자장율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식이 계율과 밀법(密法)으로 국토의 안위를 도모했고 외침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중생구제의 자비심으로 분연히 일어나 스스로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에 의지해 대장경 판각이라는 불사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국난극복이 곧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을 구제하는 보살행이었으며, 외적을 침입을 물리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자비심이었다.

이런 호국애민의 정신은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1592년(선조25) 조선은 전대미문의 전란에 휩싸였다. 일본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었다. 대비가 없었던 조선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은 빠른 속도로 줄행랑을 쳤다. 왜병의 칼날 아래 백성들은 무방비로 노출됐다. 약탈과 살육으로 아비규환 지옥의 이 땅에서 스님과 깨어있는 민초들이 함께 일어났다. 승병과 의병이었다. 스님들은 조선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사대문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양반들에게 수시로 행패를 당하고, 강제노역에 시달려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런 스님들이 일어났다. 오로지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리고 한 점 미련 없이 전쟁터에서 초개와 같이 생사를 던졌다.

수십만 명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는 살육의 시대, 평소에는 공맹을 논하고 의와 예를 따지며 백성들을 부리던 권세 높은 양반들이 줄행랑을 친 그곳에서 스님들은 목탁과 죽비를 놓고 칼과 창을 손에 쥐었다. 백성들을 지옥에서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득이 살생을 해야 하는 파계의 늪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월계(越戒)’니 ‘파계행’이니 비난도 하지만 이렇게 일어선 의승군의 활약은 조선왕조의 극난극복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승군은 서산대사로 불리는 청허휴정(1520~1604) 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서산대사는 나라와 백성을 구제해달라는 선조(1552~1608)의 간곡한 부탁으로 전국의 스님들에게 국난 국복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미 일흔을 넘긴 고령에도 1500명의 의승군을 이끌며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제자들도 차례로 일어섰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아온 스님들이었기에 더욱 감동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밀양 표충사는 의승군의 호국충혼을 기리고자 봄·가을 다례재를 봉행한다.

서산대사의 법제자 사명당 유정 스님(1544~1610)은 임진왜란의 전장에서 가장 빼어났던 의승군이었다. 스님은 “나라와 백성을 등지고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자의 도리가 아니다”며 스님들을 설득했다. 스스로도 산중에서 세속 티끌을 떠나 마음을 닦는 선승일지라도 세상의 뭇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분충서난록’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혈기 있는 자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고 있거늘 비록 이 몸은 산승이지만 조금은 지각 있는 자인데 어찌 보고만 있으냐”며 여러 스님들을 설득해 의승군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고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직접 문도 2000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 군량을 모으기 위해 각 사찰 전답에 봄보리를 심어 군량미를 마련하는 등 국난 극복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수도 한양의 복구도 스님의 몫이었다. 선조가 사명대사의 혁혁한 공로를 치하하며 그에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수여하자 이를 시기한 유생들의 비난 소리는 커져 갔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명나라 조정과 일본에서는 오히려 사명대사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직접 들어가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누가 더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지를 놓고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벌였던 대신들이었지만 누구도 일본이라는 적진에 직접 가려는 용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사명대사는 적진의 한복판에서도 협상 차 나온 일본 장수가 “조선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바로 당신의 머리”라고 호쾌하게 받아쳤다. 그런 스님의 두려움 없는 언행은 후대 스님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게 된 배경이 됐다. 1605년 사명대사는 협상 끝에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명을 송환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기허 영규 스님(?~1592)은 임진왜란 발발 후 최초로 군사를 일으킨 의승군이다.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활약을 펼친 스님은 금산전투에서 800명의 의승군과 함께 최후까지 싸워 왜군의 호남침공을 저지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하지만 역사에서 기억되지 못했다. 이때 함께 전사한 조헌과 700의병에 대해서는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塜)을 조성해 공적을 기려왔지만 영규 스님과 800의승은 제외됐다.

역사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뇌묵 처영 스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생몰연대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처영 스님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킨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행주대첩을 이끌었지만 관련 기록에서는 왜군의 기세에 밀리던 승군들이 후퇴하자 그들의 목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했다는 권율 장군의 무용담만이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밀양 표충사 경내 우화루에 모셔진 사명대사 진영.

조선시대 스님들은 천민에 가까운 신분으로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멸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전쟁이 발발하자 국난극복의 최일선에 나섰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냄과 동시에 대부분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의승군의 호국충정은 억불의 흐름 속에서 이토록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의승군 공훈에 대한 포상도 철저하게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고 말았다. 밀양 표충사, 해남 대흥사, 묘향산 수충사 등 공식 사우(祠宇)가 건립된 것은 임란 시기로부터 150~200여년이나 흐른 뒤였다. 그나마 이들 사우는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 스님들의 노력으로 인해 건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승군을 위한 제향을 봉행하는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그 명맥이 끊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해남 대흥사는 ‘표충사 제향’을 복원해 200여년 간 끊어진 명맥을 다시 잇고자 수년 전부터 대흥사 일원에서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밀양 표충사도 의승군의 호국충혼을 기리고 대승보살 정신을 본받고자 매년 봄과 가을, 불교와 유교가 함께하는 다례재를 봉행한다. 최근에는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표현한 창작 뮤지컬 ‘사명대사’를 초연하는 등 호국성지라는 역사적 의미를 일반에 더 쉽고 가치 있게 소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늘 외세의 시달림 속에 전쟁과 침략이 끝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영웅들이 나타나 고난에 찬 민중들에 희망이 됐고 수많은 백성을 구했으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영웅 가운데 스님들이 있다. 스님들의 구국 활동은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대가 또한 바라지 않은 것이었지만 결코 잊혀서는 안된다. 그런 무주상의 희생의 바로 이 땅이 오랜 역사를 유지하게 된 비결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아픔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껴져가는 나라와 민초를 구한 의승군의 희생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불교계가 먼저 기록하고 재조명해야 한다.

밀양=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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