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㉝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⑫
63.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㉝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⑫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9.10.23 13:39
  • 호수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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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2년, 중국 연호 수용하며 중국 중심 동북아 질서에 편입

김춘추, 나당군사협정 체결
신라의 커다란 외교적 성과

당나라 의복제도 적극 수용
당과 외교적 친선정책 일환

일본서기, 당복 채용과 관련
“화가 이웃나라에 미쳐”기록

집사부 설치 등 관부 개편
왕권 중심의 행정체계 구축 

국학, 실질적인 설립 작업
유교정치이념의 기반 마련
경주에 있는 사적 24호 진덕여왕릉.문화재청
경주에 있는 사적 24호 진덕여왕릉.문화재청

28대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데리고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 태종의 환대를 받으면서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귀국하였다. 백제의 침공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황제로부터 군사의 출동을 약속받은 것은 커다란 외교적 성과였다. 그리고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 삼아 당에 계속 머물게 함으로써 당과의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삼국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 북쪽의 요동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당 사이에 사활을 건 전쟁이 전개되었고, 한반도 남쪽지역에서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한 이후 당으로부터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국내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진덕여왕 3년(649) 정월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앞서 김춘추가 당에 체류할 때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요청하여 당 태종으로부터 진귀한 옷을 선물로 받아온 바 있었는데, 귀국하자 곧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신라의 공복제도는 일찍이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하면서 시행되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129년 만에 마침내 중국의 제도로 바뀐 것이다. ‘삼국사기’ 권33 잡지 색복조에서도, “진덕왕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가 당에 들어가 당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태종황제가 조서로써 이를 허가하고 아울러 옷과 띠(衣帶)를 주었다. 드디어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의 것으로 바꾸었다”고 하여 법흥왕 때에 시행된 의복제도가 김춘추에 의해 중국의 제도로 바뀌었음을 중국문화 수용이라는 유교사관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춘추가 중국의 의복제도를 받아온 사실이 당시 일본에도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645년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등과 함께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가씨(蘇我氏)를 토벌하고, 숙부인 고토쿠천황(孝德天皇)을 즉위시키었다. 그리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하고, 소가씨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아스카를 떠나 수도를 나니와로 옮기었다. 이것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2년 뒤(647)에 김춘추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담소 능력으로 주목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648)에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의 의복제도를 받아와서 신라에서 시행한 사실이 일본에도 알려져 물의를 빚게 되었다. ‘일본서기’ 권25 고토쿠천황 하쿠치(白雉) 2년(651)조에 의하면, 신라의 사신으로 사찬(沙湌), 지만(知萬) 등이 당복(唐服)을 착용하고 일본으로 간 적이 있었다. 이때 일본 조정에서는 고유한 습속을 버린 것을 싫어하여 입경(入京)을 거절하여 쯔쿠시(筑紫)에서 돌아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백제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일본으로서 신라가 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심하고 경계한 결과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이 의복제도를 통한 신라와 당의 친선관계를 꺼리고 있던 것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다음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같은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 6년(660) 7월조에서 고구려의 승려인 도현(道顯)이 저술한 ‘일본세기(日本世記)’를 주(注)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김춘추가 속복을 버리고 당복 채용을 요청한 것은 천자에게 잘 보여 당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화가 이웃나라에 미치게 하였다고 하여 김춘추의 의복제도 시행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사실에까지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김춘추의 중국 의복제도 수입과 시행은 단순히 당의 선진문물 수입 차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당군사협정을 비롯한 당과의 외교적 친선정책의 일환으로써 추진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진덕여왕 4년(650) 4월에는 왕의 명으로 진골(眞骨)로서 작위(爵位)를 가진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는데, 이 조치도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아홀은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말하는데, 홀은 관직에 있는 자가 조복(朝服)을 입었을 때 띠에 끼고 다니는 수판(手板)으로서 임금의 명을 받았을 때 이것에 기록해 두어 잊지 않게 하였다. 관료가 임금을 대면할 때 홀을 휴대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일찍이 주대(周代)부터 시행되어 왔는데, 당에서는 무덕(武德) 4년(621) 8월16일의 조칙에 의거하여 5품(品) 이상은 상아로 만든 홀, 그 이하는 대나무, 혹은 나무로 만든 홀을 사용하였으며, 모양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세계관에 의거하여 모두 위쪽은 둥글고 아랫쪽은 네모난 형상이었다고 한다. 진덕여왕 4년 김춘추에 의해 사용된 신라의 아홀도 당의 그것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골 출신의 관료에게만 사용케 함으로써 김씨왕족과 여타 일반귀족들을 구분하는 조치로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진덕여왕 4년(650)에는 당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는데, 당의 태종이 649년 5월에 사망하고 고종이 즉위하여 그 다음해부터 정관(貞觀) 대신에 영휘를 새로운 연호로 제정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23년(536)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24대 진흥왕대는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 26대 진평왕대는 건복(建福), 27대 선덕여왕대는 인평(仁平), 28대 진덕여왕대는 태화(太和) 등을 사용해 왔는데,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에 앞서 당에 사신으로 갔던 한질허(邯帙許)가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을 지적받은 바 있었다. 결국 독자적인 연호 사용의 포기와 당의 연호 사용은 이른바 책봉체제(冊封體制)라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세계의 질서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후 고려왕조・조선왕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삼국사기’ 권5 진덕왕 4년조 사론에서는 유교사관의 입장에서 천자의 나라에 속한 변두리의 작은 나라로서 사사로이 연호를 칭할 수 없는데, 법흥왕 이후 스스로 연호를 칭하였던 허물을 비로소 고쳤다고 평하였다. 

진덕여왕 5년(651) 정월에는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의 축하인사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원래 정월 초하루에 백관이 임금에게 새해인사를 올리는 하정례(賀正禮)는 한(漢) 고조(高祖)가 진(秦)을 평정한 뒤 숙손통의 건의를 받아들여 B.C. 200년 장락궁(長樂宮)에서 시행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신라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본떠서 이때에 비로소 시행된 것이다. 한편 이 해에는 중앙관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개혁을 시행하였다. 신라에서 중앙관서의 정비는 율령이 반포되는 법흥왕대에 병부와 상대등 설치를 시작으로 하고, 대외적인 영역확장을 서두르던 진흥왕대에는 병부를 중심으로 군사조직의 정비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왕권이 비교적 안정되었던 진평왕대에는 중앙의 통치제도를 광범하게 정비하였다. 즉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 공부(貢賦)를 담당하는 조부,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 그리고 선부(船府)와 승부(乘府) 등을 설치하여 신라 관제발달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진덕여왕 5년(651)에는 지금까지 설치된 관부들을 개편 보완하면서 그것을 통합 관리하거나 사정(司正)을 담당하는 관부들을 새로 설치함으로써 중대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발전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 설치된 관부로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품주(稟主)를 확대 개편한 집사부(執事部)의 설치였다. 품주는 조주(祖主), 혹은 조주(租主)라고도 하였는데, 처음에는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였으나, 진평왕 6년(584) 공부에 관한 일을 조부(調府)에 넘김으로써 재정 지출에 관한 업무만을 관장하게 되었고, 진덕여왕 때 비로소 집사부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집사부는 신라의 왕정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최고의 행정관서였다. 그리고 그 장관인 중시(中侍, 뒤에 侍中으로 개칭)는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과 달리 왕의 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왕권 강화의 중심 기능을 하였다. 초대 집사부중시로는 파진찬 죽지(竹旨)를 임명하였는데, 진덕여왕대 최고원로회의의 구성원의 한 사람이었던 술종공(述宗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38 직관지에 의하면, 진덕여왕 5년 집사부 이외에도 수많은 관부가 설치되거나 확대 개편되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된 조부(調府)에 장관인 영(令) 2인과 실무직인 대사(大舍) 2인을 증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로 구성되는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또한 품주에서 창부(倉部)의 일을 분리하여 창부를 새로 설치하고 경(卿) 2인과 대사 2인, 사 8인을 증원하였다. 그밖에 진평왕 8년(586)에 설치된 예부(禮部)에는 경 2인, 대사 2인, 사 3인, 영객부(領客府)에는 영 2인, 상사서(賞賜署)에는 대사 2인, 음성서(音聲署)에는 대사 2인, 공장부(工匠府)와 채전(彩典)에는 주서(主書) 각 2인, 전사서(典祀署)에는 대사 2인을 증원하여 조직을 정비하였다. 

관서들의 증설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학(國學)에 대사 2인을 설치한 것이다. 유교와 한문학의 교육기관인 국학은 신문왕 2년(682)에 비로소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진덕여왕 5년(651)에 이미 실무직인 대사 2인이 설치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실제적인 설립 작업은 진덕여왕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고, 특히 당의 국학(국자감)을 직접 참관하였던 김춘추는 신라에서도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정치이념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주목되는 관부로서 좌리방부(左理方府)를 설치하여 영 2인, 경 2인, 좌(佐) 2인을 두고, 초대 장관인 좌리방부령에 천효(天曉)를 임명하였다. 좌리방부는 신라에서 형률(刑律)과 법령(法令)을 관장하는 부서로서 진덕여왕 5년 처음 설치된 것은 이방부(理方府)였는데, 문무왕 7년(667)에 우리방부(右理方府)가 증설되면서 좌리방부로 불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리방부에서는 무열왕 2년(655) 왕명으로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제정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율령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업무를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이방부는 당의 대리사(大理寺)를 모범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율령의 제정이나 개정의 역할뿐만 아니라 고급관료의 취조 역할까지 수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역시 같은 해인 진덕여왕 5년(651)에 설치되어 왕궁 시위를 맡은 시위부(侍衛府)와 함께 왕권 강화의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관서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09호 / 2019년 10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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