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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불교대축제 특별법문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9.10.26 01:18
  • 수정 2019.10.26 01:19
  • 호수 1510
  • 댓글 0

10월20일, 부산시민공원 특설무대
“욕심 비우면 모든 존재 소중”
“생사가 곧 열반 이치 알아야”

10월20일 부산시민공원에서 봉행된 부산 불교문화대축제에서 특별법문을 설한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10월20일 부산시민공원에서 봉행된 부산 불교문화대축제에서 특별법문을 설한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산에서 열리는 불교문화대축제에 모이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한 시간 전, 두 시간 전, 하루 전, 또 한 달 전 이렇게 미루어 짐작해 보면 끝없는 과거부터 온갖 생각을 하고 온갖 것을 보고 온갖 일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여서 축제를 여는 이 뜻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저도 이 질문을 받을 때 나름대로 지금까지 지내온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립니다만, 확실한 것은 나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겪거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하고 장사 하는 사람은 장사하고 학문 하는 사람은 학문하고 종교를 하는 사람은 종교를 합니다.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하고 있지만, 뜻밖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좋은 말이 나옵니까? 불쑥 상대에게 괴로운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화가 날 때는 점잖거나 좋은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이럴 때 “입을 다물고 하루, 이틀 지내라.”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차분하게 될 것이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었는지 그 근본을 밝히면 상대방에게도 결코 괴로운 말을 하지 않고 괴로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곤충, 벌레, 미물까지도 똑같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어떻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가장 잘난 줄 알고 돼지, 소를 잡아먹고 벌레를 죽이며 온갖 살생을 하고 있습니다. 돼지나 소의 입장에서, 우리를 잡수어달라는 동물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어느 과거에는 우리 역시 사람이었는지 벌레였는지 짐승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무한한 과거에 수없이 나고 죽을 때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목전에 있는 벌레나 동물이 어느 때는 부모였고 형제였고 자식이었고 가족이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결코 함부로 죽일 수 없지요.

세계평화를 이루자고 노력하고 있지만, 왜 아직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과학자가 이렇게 자문했다고 합니다. “이제 비행기도 있고 전등도 켜고 모든 생활이 편리하게 되었는데, 과연 사람이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인가?” 돌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목이 마를 때 지나가다가 흐르는 물을 마셔도 괜찮았습니다. 지금은 마셨다가는 큰일 나지요. 공기도 그렇습니다. 옛날에 그 맑던 공기가 지금은 산중까지도 미세먼지가 꽉 차서 숨을 쉬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과학은 인간이 좋기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기저기서 세계평화를 외치지만 동서남북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버리는 것이 현실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계평화 이루는 데는 특별한 이론이 필요 없고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습니다. “남을 해치지 맙시다.” “남을 괴롭히지 맙시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생각으로 말로도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되지요. 행동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만 지키면 세계평화는 저절로 됩니다. 하지만 너무 쉬워서 하기 싫은 것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지식인이나 과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괴로움을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말씀 한마디로 해결해 주시니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 근본 지혜는 중생이나 부처나 똑같이 갖추고 있지만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 없는 일을 겪는 가운데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를 끊임없이 분별해 왔습니다. 누군가 욕을 하면 불쑥 화가 올라오고, 칭찬하면 우쭐하여 흔들립니다.

이럴 때 한 생각 돌이키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화의 감정이 일어날 때 ‘내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이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며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아 보면 모든 망상이 다 사라집니다. 사라짐 속에 감정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던 밝은 지혜가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을 도와주려 하다가도 자칫 잘못하면 감정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악한 행동을 한다든지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 부끄럽고 나를 가르쳐준 스승께도 너무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굳게 결심하면 나쁜 길로 가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서 남을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치고 나쁜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종교 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종교가 틀렸다며 적대시하고 종교전쟁을 벌일까요? 모두 욕심입니다. 참된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종, 염불종 등 온갖 종단이 있지만 수행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종이 옳고 어느 종은 틀리다, 어찌 그런 말이 있습니까? 바다에 흘러가는 강물이 한강도 있고 낙동강, 임진강, 두만강, 그 물줄기는 다르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한 물이 됩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된 이치이며 거짓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진리는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듣고 입으로 먹고 코로 냄새 맡고 항상 느끼고 있으면서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의 감정이 좋으면 취하려 하고 싫으면 버리려고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떨쳐버리면 도(道), 다시 말해 진리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있을 때, 만일 종소리가 난다면 귓전에 종소리 울리지요? 찬 바람이 불면 차게 느끼지요? 앞에 물체가 있으면 눈에 딱 들어오지요? 이것은 모두 진실입니다. 그런 진실 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이러쿵저러쿵 말로 설명하고 생각하고 그것은 가짜 거짓이라고 분별합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가 하나로 화합됨을 모색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무슨 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방법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겠습니까? 우리는 불자입니다. 같은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으로 보면 고려 때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몽골군이 쳐들어와서 그 전쟁의 와중에 산에서 나무를 베어 판자를 만들어서 바닷물에 삼 년씩 담그고 거기서 베껴 쓰고 조각하여 완성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모든 국민, 정치인이나 군인이나 다 뭉치지 않았다면 그런 사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여당, 야당 싸우고 이렇게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었겠어요? 그 힘든 몽골 침략기에도 뭉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흐트러져 있어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국민은 팔만대장경 이상의 힘을 가지고 저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분별의 감정들을 탁 털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길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기술을 두고 왜 바보같이 지내야 합니까? 이제 제가 한마디 더 진리에 대해서 군소리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지유 스님이 특별법문을 설한 부산 불교문화대축제.
지유 스님이 특별법문을 설한 부산 불교문화대축제.

진리를 얻겠다, 도를 닦겠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망상분별입니다. 이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를 돌이켜봐야 합니다. 염불하고 있으면 염불하고 있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화두를 들고 있으면 화두를 들고 있는 이놈이 또 어떻게 생겼는가? 생각하고 있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너무 간단합니다. 예를 든다면 파도가 치고 있습니다. 이쪽 파도와 저쪽 파도가 이렇게 대화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 모르겠다. 한 번 생각해보자. 그래서 잠을 자지 않고 십 년 동안 열심히 파도를 치며 애를 써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자며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10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애를 써서 우리의 본래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지만 여태까지 노력해봐도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식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렇다면 내 말을 듣겠느냐?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 다 집어 던져버려라. 파도는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파도치고 파도치며 생각하던 것을 그쳤습니다. 모든 파도가 없어지고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파도는 여기서 왔고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여기가 본모습입니다. 파도는 움직이는 용(用)이라고 하면 파도의 체(體)는 물 아닙니까?

우리가 깨닫겠다고 하는 이 움직임이 생각이라면 생각의 체는 움직이는 파도가 없어져 물이 드러나듯이 감정 속에서 감춰져 있던 우리의 마음입니다. 파도가 없어져도 물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관(觀)하고 있는 속에 생각이 없어져도 마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생사 속의 불생불멸, 생사가 곧 열반,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10월20일 부산시민공원 특설무대에서 봉행된 ‘부산 불교문화대축제’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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