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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호적

기자명 이병두

1916년 9월11일, ‘조선 선교양종 30본산 연합사무소’가 조선총독 앞으로 보낸 ‘승려의 민적(民籍)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에 주목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2년 전인 2007년 2월에 ‘승려 호적문제 이대로 좋은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공문은 “①각 사찰에 호구를 하나로 세워 주지를 호주(戶主)로 하고 다른 승려들은 (일반) 가정과 같은 가족구성법에 따라 주지 아래에 함께 적을 올리는 것이 어떠하올지? ②새로이 승려가 된 사람은 불전(佛前)에서 새롭게 계명을 받아 이름을 바꾸는 관례가 있으므로, 관습에 따라 새로 승려가 된 사람에 한하여 개명(改名)하는 일을 허가하시는 것이 어떠하올지?”라고 하면서 스님들이 따로 호적을 만들 수 있게 하고 법명을 호적상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두 달 뒤 총독부에서 “불가하다”는 회신을 보내왔지만, 당시 불교계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승려의 호적 문제’를 제기했던 시점에서 100년의 세월이 흘렀고 여러 방면에서 근대화‧현대화의 길을 밟고 있다지만, 이 문제에서만 본다면 불교계는 그때의 의식수준에 비해서 훨씬 뒤떨어져 있어서 현대화는커녕 근대화에서도 매우 뒤처져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100년 전에 비해 ‘스님들의 호적을 정리하는 문제’는 더욱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개인 재산이나 상속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스님들이 입적하면 세속 사회의 민법 규정에 따라 재산 상속의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스님들이 왜 개인재산을 소유하느냐?”는 원론적인 물음을 걸고 나오는 이들이 많겠지만, 이런 주장은 한편으로 맞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현재 법률 규정으로는 출가 수행자나 성직자에 대한 예외규정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이 입적하고 나면 일체의 재산 관련 권한을 속가의 형제·자매, 혹 형제가 없으면 심지어 촌수가 먼 친척이 상속받게 되어 있다. 신도들이 아껴서 보시한 돈으로 새로 절을 짓거나 중창불사를 하기 위해 스님 명의로 사놓은 땅과 건물이나 종단으로 등기 이전을 서두르지 않고 있던 사설사암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 명의로 된 예금과 보험금 등이 모두 세속 법 규정에 따라 속가의 가족과 친척에게 상속된다. 스님이 이전 절차를 미처 하지 못하고 입적한 뒤, 스님과 수십 년 동안 왕래가 없이 지내던 이복형제나 남매 등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도 아주 많다. 은행 예금이나 보험금은 법률상 상속자가 아니면 아예 인출이 불가능하고 부동산의 경우에는 사찰과 합의가 안 되면 십중팔구 소송을 제기하는데, 재판부에서는 민법 규정에 따라 사찰 측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속가 가족과 친척들이 신심이 깊어서 삼보정재의 소중함을 알고 스님이 생전에 속했던 각 종단에 귀속시키면 좋겠지만 갈수록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그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스님과 신도들이 애써서 마련한 사찰재산이 이렇게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변호사 수임료 등 법률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포교와 후진 양성 등 불사에 쓰여야 할 삼보정재가 엉뚱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호적’ 문제에 대해 불교계가 계속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정부 예산 수십, 수백억 원을 지원받는 일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므로, 대표 종단인 조계종부터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여야 정치권과 협의하여 각 교구별로 ‘스님들의 호적’ 을 따로 만들 수 있는 입법을 청원하고, 입법이 성사될 수 있도록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야 한다.

아무 대책도 없이 넋 놓고 있다가는, 앞으로도 막대한 삼보정재가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가게 된다. 스님들의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는 심지어 ‘반(反) 불교적인 이교도’들도 있을 수 있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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