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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법성게’ 제30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③ - 구래부동의 십불

기자명 해주 스님

무착불‧원불‧업보불이 법성신임을 관하면 무진공덕 나를 통해 펼쳐져

열이라는 수는 완전수이니
십불은 모든 부처님 포섭

깨달음서 보면 다만 마음이니
경계 집착할 것 없어 무착불

한 법 듦에 따라 일체 거두어
법계 들어맞아 두루함이 원불

백사십원‧십회향원‧초지원‧성기원
의상 스님이 원의 대표로 설명

원인 등이 업이고 결과는 보이며
해인삼매 밝은 법이므로 업보불

의상 스님은 ‘법성게’에서 수행의 극과를 “구래부동명위불”로 총결하고, 구래부동의 부처님을 법성신이 출현하는 십불(十佛)로 말씀하고 있다. 열이라는 수는 완전수이니 십불은 모든 부처님을 포섭한 열 부처님이다. 

‘일승법계도’에서 소개한 ‘이세간품’의 십불에 대하여 의상 스님이 직접 설명을 더한 것이 ‘총수록’의 고기에 전한다. 십불에 대한 설명은 ‘법융기’에서도 자세하며, ‘화엄경문답’에서는 이 십불을 모두 공덕불로 포섭한다. 공덕자재가 부처님이니 모든 보살행도 공덕행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고기’에 보이는 의상 스님의 십불 법문을 차례로 인용 하면서, 여타 문헌도 참조하여 십불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 보기로 한다. 

첫째는 무착불(無著佛, 無着佛)이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셨다. 

“이른바 ‘무착불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安住世間成正覺故]’란 다음과 같다. 

오늘 내 오척 되는 몸을 세간이라고 이름하며, 이 몸이 허공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정각’이라고 한다.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기 때문에 ‘무착불’이라고 한다.(고기)

의상 스님은 세간과 정각, 무착 그리고 실제의 무착불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무착불’이라는 경문을 이해시키고 있다. 

화엄십찰 갑사 전경.<br>갑사대웅전관음보살. 표훈스님발원문복장. 갑사제공<br>
화엄십찰 갑사 전경.                                                               갑사제공

먼저 세간이란 오늘 내 오척되는 몸이고, 정각이란 이 몸이 허공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 몸이 법계에 두루 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씀인가? 그 경계를 알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내 오척되는 몸인 세간이 일체 모든 존재인 삼세간이기 때문이다. 내 오척되는 몸이 융삼세간불로서 오척법성신이 법계에 두루 원만한 것이 정각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의니, 생사와 열반에 다 집착함이 없어서 부주생사(不住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이다. 그런데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기 때문에 ‘무착불’이라는 것이다. 

‘법융기’에서도 이러한 무착불에 대하여 재차 설명을 더하고 있다. 내 오척 되는 몸이 곧 삼세간이므로 세간에 편안히 머문다는 것이며, 삼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으나 중생의 업과 번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아니하므로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또 연기법 가운데는 한 법이라도 제거하면 모든 법 전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중생의 업으로 인한 미혹과 번뇌에 대해서 만약 하나라도 제거한다면 정각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착이란 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며 집착하되 집착이 없음이다. ‘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란 비록 마음이 경계를 보지 아니하되 일체의 경계가 내 마음 아님이 없는 것이고, ‘집착하되 집착없음’이란 일체가 내 마음이 나아가 향한 바 아님이 없지만, 기준으로 하는 것마다 곁이 없는 것이다. 깨달은 마음으로 보면 다만 마음일 뿐이니 상대하는 경계에 집착할 것이 없어서 무착불이라 한다는 것이다. 

‘화엄경문답’에서는 무착불이 모든 공덕에 머물고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엄 스님의 해석에 대해, 일체 세간 법문이 다 불공덕으로서 장애가 없어서 머물러 집착함을 여의었으므로 무착불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간에 안주하여 정각을 이루신 무착불을 관해보면, 융삼세간으로서의 일체 존재가 바로 나의 몸과 마음이니 생사와 열반을 따로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내 마음이 일체에 걸림없이 자재하여 무착불의 무진 공덕을 펼치게 된다. 

갑사대웅전관음보살. 표훈스님발원문복장. 갑사제공

둘째는 원불(願佛)이다. 

‘원불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出生故]’란 다음과 같다. 백사십원(百四十願)· 십회향원(十廻向願)· 초지원(初地願) 및 성기원(性起願) 등이 모두 원불이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이 없음[無住]으로 몸을 삼기 때문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 아님이 없다.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거두어 법계에 들어맞아 두루함을 원불이라고 이름한다.(고기)

원불이란 원에 의해 부처님이 출생하시기 때문이다. 출생의 의미를 ‘법융기’에서는 찰나 찰나에 새롭고 다함없는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풀이한다. 해인삼매 중에 삼세간의 일체 모든 법을 출생시키고 또 삼세간의 낱낱 법은 법계의 모든 법을 출생시키니, 이러한 법은 일체중생의 몸과 마음 가운데 항상 그러하다. 여래께서 이 법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은 다만 서원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출생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원불’이라고 한다.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수많은 원 가운데 특히 백사십원·십회향원·초지원·성기원 등 네 가지 종류의 원을 대표로 들고 있다. 

먼저 백사십원은 ‘정행품’에 보이는 141가지 원이다. 이 원은 신구의 삼업으로 수승하고 묘한 공덕을 얻어 제2도사가 될 수 있는 정행이다. 보살이 마음을 잘 쓰는 선용기심(善用其心)의 행원으로 부처님이 출생하므로 원불이라는 것이다. 

다음 십회향원이란 ‘십회향품’에 보이는 모든 회향의 원을 가리킨다. 회향의 ‘회’는 회전(廻轉)이고 ‘향’은 취향(趣向)의 뜻이니, 보살이 자기의 만행을 돌려서 10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십회향은 ‘일체 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난 회향’ 내지 ‘법계에 들어가는 한량없는 회향’이니, 보살이 삼세 모든 부처님의 회향을 닦아 배우는 원이다.

십회향중 첫째 회향은 보살이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으로 무량선근을 닦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고 청정케 하여 마침내 모든 고통을 영원히 떠나게 하려는 회향이다. 그래서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이익을 주고 마침내 모두 일체지를 얻게 하니, 이것은 자신의 선근을 돌려서 다른 이의 선근으로 향하게 하는 회자향타(廻自向他)의 원이다. 

이처럼 회향이란 자기의 선근을 다른 이의 선근으로 돌리듯이, 적은 선근을 많은 선근으로, 자기 인행을 남의 인행으로, 원인을 결과로, 하열한 것을 수승한 것으로, 비량을 증지로, 현상을 이법으로, 차별행을 원융행으로, 세간을 출세간으로, 이법을 현상으로 돌리고 확대해서 모든 공덕을 증장시키는 일 등이다.

이러한 열 가지는 다시 크게 중생회향(衆生廻向)·보리회향(菩提廻向)·실제회향(實際迴向)의 세 가지로 거두어진다. 전국사찰에서 부처님께 축원 올릴 때 항상 ‘삼처에 회향하여 다 원만하여지이다[廻向三處實圓滿]’라고 발원하고 있듯이, 십회향원은 보살의 모든 공덕을 중생과 깨달음과 실제로 회향하여 원만하게 해서 자타일시성불도 하는 원행인 것이다. 

다음 초지원이란 십지중 처음 환희지에서 일으키는 열 가지 대원이다. 그 첫째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공양원이고, 내지 열째는 일체 세계에서 정각을 이루고 중생 마음 따라 성불함을 보여서 적멸을 얻게 하는 성정각원(成正覺願) 이다. 대승보살은 원에 의해 태어난 원생보살이니, 모든 보살행을 다 거두는 자리인 십지의 첫 자리에서 대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성기원이란 ‘보왕여래성기품’에서 여래출현의 모든 양상을 열 가지로 설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원의 원만성취가 원불인 것이다. 

‘화엄경’에서 모든 원은 보현행원으로 거두어지는데 ‘보현행원품’의 한역은 의상 스님의 입적 후에 이루어지므로 원불의 원에 ‘보현십대원’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체 공덕이 다 부처님의 원을 따르고 중생의 원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어서 원불이니 ‘화엄경문답’ 모든 원행 역시 무진 공덕행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업보불이다.

‘업보불이니 믿기 때문이다[信故]’란 다음과 같다. 22위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아니하며 두렷이 밝게 비추니, 만약 모든 수행인이 능히 이와 같이 믿으면 곧 ‘믿음[信]’이라고 한다. 만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설하면, 위로 묘각으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 일(佛事)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이 일을 공경히 믿으면 ‘업보불’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기)

세간인 육도와 출세간의 원인 등이 업(業)이고 그 결과가 보(報)이며,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두렷하고 밝은 법이므로 ‘업보불’이라고 한다. ‘법융기’역시 일체 중생이 자신의 참된 부처가 그 몸과 마음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믿지 않기 때문이니, 오직 믿는 마음만으로 업보불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화엄경문답’에서는 모든 공덕이 중생업의 과보와 상응하니, 이를 믿으면 업보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으면 하는 일마다 업보불의 불사가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화엄법계의 무착불·원불·업보불이 예부터 부동의 법성신임을 바로 관해 보면, 부처님의 무진 공덕이 나를 통해 펼쳐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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