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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선원이 곧 死關…염화미소 이치 깨닫기를”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

위례천막결사 대중 위해 직접 작시
선은 ‘적당히’ 넘어선 결연함 필요
생사 건 정진 그 자체가 뜻깊은 일
한국불교 거듭나는 새 전기되기를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

曹溪禪風何處覓(조계선풍하처멱)
霜林獨座透祖關(상림독좌투조관)
月燭雲捲照大千(월촉운권조대천)
拈花微笑卽次在(염화미소즉차재)

조계선풍 어디서 찾으랴.
서릿발 속 오롯이 앉아 조사관을 뚫어라.
달빛 구름 걷히고 대천세계 빛나니
염화미소가 바로 이 자리리라.

10월13일 새벽이었다.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허리는 꼿꼿이 세웠다. 일순간 의식이 명경(明鏡)처럼 투명해지더니 돌연 시구들이 하나둘 선명히 떠올랐다. 스님은 그 시구를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 옮겨 적었다. 자신이 시를 지었다기보다 저절로 지어졌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싶었다.

법산 스님은 9명 스님들이 위례 상월선원에서 동안거 천막결사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언론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여느 안거 정진과는 확연히 달랐다. 결사 기간 내내 말 한 마디 않는 것은 물론 하루 14시간 정진한다고 했다. 공양도 하루 한 끼, 옷도 한 벌, 양치만 허용하고 삭발과 목욕까지 금했다. 게다가 규약을 어기면 조계종 승적에서 제외한다는 각서와 제적원까지 제출한다고 했다. 여간한 결심이 아니라면 며칠도 견디기 어려운 그야말로 생사를 내건 정진이었다.

“일각에서 고행이니 극단이니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건 선을 잘 모르고서 하는 얘기입니다. ‘적절히’ ‘적당히’는 세간에서나 통용되는 말일 뿐입니다. 선은 ‘적당히’로 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백척간두의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겠다는 죽을 각오가 없으면 결코 번뇌망상을 조복 받을 수 없습니다. 선재동자가 구법을 위해 불속에 뛰어들었던 것이나 옛 선사들이 수마를 물리치려 턱 밑에 송곳을 세웠던 것도 모두 진리에 대한 간절함에서 비롯된 행위였습니다. 위례 천막결사에 동참하는 스님들이 찬탄과 격려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법산 스님은 1985년 대만에서 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25년을 재직한 한국 선학의 권위자다. 동시에 스님은 ‘이뭣고’ 화두를 늘 챙기는 참선수행자이기도 하다. 정년퇴임을 4년 앞둔 2006년 여름, 스님은 방학을 이용해 지리산 벽송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1970년대 은사인 경봉 스님 밑에서 참선수행을 했지만 교수로 재직하면서 안거에 들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불교와 선어록에 밝다고 해서 수행과 깨침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스님이다. 그렇기에 ‘수행이 없는 학문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수행이 뒤따르는 학문은 모래를 녹여 반도체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오랜 신념을 마침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후 스님은 늦깎이 수좌로 안거 때마다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세수로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누구보다 올곧게 정진하려 했고 사찰에서 필요로 하는 울력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렇듯 비장한 각오로 정진했던 스님이기에 혹독한 겨울날 허허벌판에서 진행될 위례 천막결사의 결연함이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말 있는 곳에서 말 없는 곳으로 가는 게 교학이라면 말 없는 곳에서 말 없는 자성을 깨닫는 것이 선입니다. 위례 천막결사 현장은 가장 치열한 수행의 공간으로 그곳이 바로 무문관입니다. 무문관은 다른 말로 사관(死關)이라고 합니다.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지만 그에 앞서 자신부터 죽여야 합니다. 빗장을 걸어 잠그고 여기서 죽겠노라고 정진하면 번뇌망상의 ‘나’는 죽고 자성청정심의 내가 살아납니다. 살아날 길 없는 막다른 곳에서 살길이 생긴다는 절처봉생(絶處逢生)의 이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법산 스님은 결사 대중들이 한국불교의 중흥을 발원하며 생사를 걸고 정진을 한다는 그 자체로서 뜻깊고 숭고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그분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외호하는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는 불자들의 정성도 기억돼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홉 분 스님 모두가 상월선원이라는 사관에서 염화미소(拈花微笑)의 깨달음과 불꽃에서 연꽃을 피우는 화중생련(火中生蓮)의 이치를 증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원력과 수행력으로 한국불교가 신뢰받는 불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불교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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