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 정리=주영미 기자
  • 승인 2019.11.04 14:24
  • 호수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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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는 생각 멈추고 지혜 일으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경문·경의·경지 익히는 게 간경
경전을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분별하는 생각 멈추게 하는 것
멈추고 멈추다 보면 지혜 밝아져
​​​​​​​
경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문자
성과 중심 공부는 마장만 불러
‘몇번 읽었다’ 드러내기보다는
그냥 외우고 관하는 습관가져야
종범 스님은 “경전을 읽으면 불만, 의심, 공포가 자기도 모르게 멈춰진다”며 “멈추면 멈출수록 밝은 지혜가 점점 더 밝아진다”고 강조했다.
종범 스님은 “경전을 읽으면 불만, 의심, 공포가 자기도 모르게 멈춰진다”며 “멈추면 멈출수록 밝은 지혜가 점점 더 밝아진다”고 강조했다.

경전을 펴면 글자가 나옵니다. 이를 경문(經文)이라고 합니다. 경문을 보다 보면 연결되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경의(經義)라고 합니다. 그 밑에는 경에서 가리키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경지(經志)라고 합니다. 이렇게 경에는 경문이 있고 경의가 있고 경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공부하는 것이 경전공부입니다. 


불교는 흐르는 물이 바다로 가듯이 말이나 행위나 생각이 다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하고, 해탈이라 하고, 입도(入道)라고도 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입법계(入法界)라고 합니다. 도라는 것은 무엇이고 해탈은 무엇이고 경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깨달으신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생각으로 헤아립니다. ‘앞이다’ ‘뒤다’라는 것은 생각입니다. 법계에는 선, 후가 없습니다. 앞, 뒤는 생각으로 인식하는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 뒤가 없음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앞, 뒤 없는 데로 들어가면 해탈입니다.

진실과 인식체계는 다릅니다. 선후, 양변, 동서가 없는 세계가 절대 진실세계입니다. 의식으로는 선후양변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데 절대 진실 세계로 들어가면 선후양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공이라는 것도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중생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허공계, 중생계가 그대로 선후도 없고 양변도 없는 절대 진실의 법계인데 의식이 선후양변으로만 인식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배울 것을 다 배우고 연구할 것을 다 연구해도 늘 의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의심은 항상 남아 있습니다. 의심은 또 두려움을 낳습니다. 의심과 공포는 배워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심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 생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방법입니다. 

생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인간은 왜 죽고 사는지 알 수 없고, 죽고 사는 데서 만족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냥 만족하면 그만인데 만족을 못 느끼면 의심과 공포가 일어납니다. 불만족도 의심도 공포도 없으면 끝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그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하다 보니 생각이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딱 멈추어버렸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지(止)입니다. 생각을 그치는 것이 깨닫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심층에 들어가 보면 불만, 의심, 공포가 똑같이 있습니다. 생각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깨닫지 못합니다. 의심과 공포뿐입니다. 나아가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과 잠에 빠지는 것이 산란과 수마입니다. 선정은 산란이 없는 것이고 수마에도 빠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관(止觀)입니다. 그치고 다만 광경을 보는데, 생각이 보는 대상을 쫓아가지 않고 그냥 딱 그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선후가 없고 양변이 없는 세계를 봅니다. 그것을 진여법계(眞如法界)라고 합니다. 진여법계에는 선후가 없으니 생사도 없습니다. 양변이 없으니 음양이 없습니다. 생각이 나누어 분별하고 불만을 갖고 의심을 갖고 두려워하니 그것을 중생번뇌라고 합니다. 중생번뇌가 고쳐지지 않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불만, 의심, 공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방법은 그냥 딱 그치고 보되, 보기만 했지 더 이상 분별을 하고 쫓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보는 행위를 통해서 생각이 점점 맑아집니다. 쫓아가면 맑아지지 않습니다. 맑아지고 맑아지니까 본래 자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의 나, 참 그대로의 나입니다. 지금 우리는 몸을 나라고 착각하는데 이것을 색수상행식,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온의 나로 살아갑니다. 제불(諸佛)은 진여의 나로 살아갑니다. 진여의 나로 살아가면 도인이고, 몸과 생각의 나로 살아가면 오온, 중생, 범부입니다. 

오온의 나는 풀잎의 이슬처럼 생겼다가 해 뜨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연 따라 생겼기에 인연 따라 갈 물건인데 여기다가 희망을 갖고 목을 매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 몸이 사라지는 줄 아니까 돌멩이에 이름을 써서 남기고 싶고, 책을 써서 남기고 싶고, 무엇인가를 해서 남기고 죽으려고 합니다. 자식에게 해주려고 하는 것도 ‘나는 죽지만 내가 낳은 자식은 남아있다’고 자신을 자식으로 연장하려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그치고 그대로 전체적으로 딱 보면 생각은 사라지고 생각 속에 있는 진여 광명이 나타납니다. 참선을 하는 것이나 경을 보는 것이나 염불을 하는 것이나 공덕을 짓는 것이나 불사를 하는 것은 전부 의식의 나에서 벗어나 진여의 나가 나타나서 선후도 없고 양변도 없는 절대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 중에서도 특히 경을 공부하려면 첫째, 글을 접해야 합니다. 글을 접하고 읽는 것을 송경(誦經)이라고 합니다. 송경을 하다보면 말씀을 해석하는 석사(釋詞)를 합니다. ‘경을 새긴다’고도 표현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과정을 수지독송서사(受持讀誦書寫)라고 합니다. 글로 보고 말로 읽고 경문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경문공부입니다. 경전 공부는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수행의 형식과 본질을 말할 때, 경봉 큰스님께서는 비단 장수와 망부석 법문을 하셨습니다. 비단 장수가 비단을 짊어지고 망부석이 있는 곳에서 쉬다가 졸았는데 깨어보니까 비단이 없어졌습니다. 원님에게 가서 비단을 찾아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도저히 모르겠고 옆에 망부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님은 그 망부석을 빼오라고 합니다. 빼다가 마당에 세워놓고 그냥 팼습니다. 소문이 나서 온 고을 사람들이 다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마을 사람들이 정사에 대해 구경하고 희롱한 불경죄를 물어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잡아놓고는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비단 한 필씩만 가져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가져오는 비단마다 이것은 누가 낸 비단이라는 상세한 정보를 다 적었습니다. 원님은 그 비단을 모아서 비단 장수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비단을 찾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비단을 훔쳐간 사람을 찾아냈고, 나머지 비단은 마을 사람들에게 다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깔끔하게 해결한 것이지요. 

망부석을 때린 것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단 훔쳐간 사람을 잡는 데 뜻이 있습니다. 읽기는 경을 읽었는데 깨달음은 경을 읽는데 있지 않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경전을 읽으면 불만, 의심, 공포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집니다. 멈추어지면 멈추어질수록 밝은 지혜가 점점 더 밝아집니다. 그 다음이 해경(解經)인데, 경의 뜻을 해석하는 공부입니다. 이것을 의해(義解)라고도 합니다. 경의 뜻을 해석하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원효 성사의 ‘대승기신론소’라든지 ‘금감삼매경론’이라든지 하는 책은 전부 의해입니다.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해서 다른 불교 전적으로 경을 해석하는 것이 논(論)이고 소(疏)입니다. 한두 가지만 봐서는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 방면에 많은 학습을 해야 논, 소라는 것을 쓸 수 있습니다.

경은 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에서 말하는 해탈, 진여, 본성, 인간의 본래면목을 보아야 합니다. 이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수신(受身)면목입니다. 본래면목은 부모가 낳기 전부터 있던 면목인데 그것이 진여의 나입니다. 오온의 나와 진여의 나가 만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간경(看經)입니다. 경의 뜻은 경을 해석하고 외운다고 해서 알 수 없습니다. 간경을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라고 했습니다. 오온이 개공(皆空)이라는 것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공은 불생, 불멸, 불구, 부정, 부증, 불감입니다.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형상으로 보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더 깊게 보면 그것은 생멸이 아니라 불생불멸이다, 이렇게 조견을 해야 합니다. 수없이 생기고 수없이 사라지는 것에서 사라짐도 사라짐이 아니고 생김도 생김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까지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경전공부입니다. 조견이라고도 하고 관행(觀行)이라고도 합니다. 관한다는 얘기는 보되, 보는 데 따라가지 않고 멈춰서 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경전 공부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빠르고 쉬울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보기만 합니다. 더 이상 쫓아가지 않습니다. 그냥 보는 상태에 그쳐서 보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경이라는 것은 깨달음에서 흘러나온 문자입니다. 또 깨달음으로 가도록 하는 문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경을 읽다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인간은 항상 성과를 구합니다. ‘나는 왜 모르지?’ 그것이 경전 공부를 못하게 되는 마장입니다. 결과를 생각하면 그 때부터 안 되는 것입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세간 공부는 결과부터 생각해야하고 성과를 내어야 합니다. 불교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공부이기 때문에 성과를 내야지하고 측량하지 말고 그냥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경을 여러 번 읽었다, 몇 백 독을 했다, 그런 숫자는 다 쓸 데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만날 때까지 원력을 갖고, 만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외우고 관하고 외우고 관하고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 경전 공부의 옳은 방법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이 지난 10월8일 부산불교신도회 법계정사에서 봉행된 ‘부산불교거사림(회장 공병수) 창립 47주년 기념법회’에서 ‘경전 공부’를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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