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상재의 해학
133.  이상재의 해학
  • 김정빈 교수
  • 승인 2019.11.04 17:35
  • 호수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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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어야 할 때 울었고 울어야 할 때 웃었다”

몰락한 양반가 가문서 태어나
서재필 이끄는 독립운동 동참
남에게는 자상, 나에겐 늘 엄격
유가에선 찾기힘든 해학 있어
악질적 일본 형사도 굽신거려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일제강점기 민족 지도자였던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충남 서천군의 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젊었을 때 조상의 산소 문제 때문에 부친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때 상재는 관서를 찾아가 아버지를 대신해 옥살이 하기를 청하여 사흘간 갇혀 지냈다. 그런 다음 고을 수령을 만나 억울함을 호소하여 아버지를 무죄 방면케했다.

열여덟 살에는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했는데, 당시 과거장 풍경은 엉망진창이었다. 대놓고 글을 베껴 쓰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던 것이다. ‘한심하다. 다시는 이런 곳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과거장을 떠났는데, 다만 그곳에서 만난 박정양이라는 이와의 교분은 그의 출세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박정양은 이상재의 사람됨에 반하여 국가 시찰단장으로서 미국을 방문할 때 이상재를 데려갔고, 1881년에 미주 공사로 부임하면서는 그를 일등서기관으로 등용했다. 얼마 안 있어 이상재는 새로 설립된 우정국 책임자 홍영식에 의해 인천 우정국장이 되어 일했다.

19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곧 실패했다.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개화파의 거물이었던 홍영식과의 친분 때문에 이상재에게 큰 액난이 미쳐 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만한 상황이었다. 위기 앞에 선 이상재는 스스로 수사 책임자를 찾아가 자신과 홍영식과의 관계를 밝힌 다음 고향 한산에 계시는 노부모를 만나러 갈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해주었다. 수사관은 그의 당당함과 씩씩함에 감복하여 더 이상 이상재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 후 이상재는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그는 뛰어난 웅변술을 능숙하게 발휘하여 당대의 권세가들을 비판했다. 그런 끝에 집권층의 미움을 사 개화당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가 다시 문제가 되어 2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나이 쉰네 살 때 그는 감옥에서 처음 신구약 성서를 만났다. 큰 감명을 받은 그는 기독교적인 정신 운동으로써 조국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머지않아 석방이 된 그는 임금에 의해 의정부 참찬으로 등용되었는데, 다음 해에 직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때는 을사 5조약이 체결된 다음으로, 조국의 운명은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상재는 기독교 운동을 통해 민족의 정신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당시의 민족 지도자들은 오늘날과는 달라서 거의 모든 이들이 다 군자로서의 품격을 갖고 있었다. 유교인이야 당연하다 하더라도 불교인이든 유교인이든 천도교인든 기독교인이든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모두 조선조 오백 년을 지탱해온 유가적인 품격을 기본으로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상재는 그런 유가적 인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인격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해학이었다. 조선조의 많은 큰 인물들 중 해학, 또는 유머를 갖춘 이는 매우 귀하다. 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 해학과 유머를 구사할 줄 알았던 인물로서 우리는 이항복과 김삿갓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시 ‘논개’로 유명한 변영로는 어려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웠다. 어느 날 그가 종로 큰길을 지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변정상 씨! 변정상 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이상재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변영로가 항의했다. “선생님,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제 부친 함자로 저를 부르시다니요?” 이상재가 껄껄 웃었다. “네놈이 변정상이의 씨(아들)가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

이상재가 대중 강의를 하면 일본 형사들이 사복을 하고 뒤에서 감시를 하곤 했다. 어느 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상재가 청중에게 말했다. “오늘도 개나리꽃이 활짤 피었소이다그려.” ‘나리’는 작은 관직을 가진 사람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개’는 남을 평가절하하며 욕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두 말을 결합하여 그는 일본 형사를 ‘개-나리’라고 불렀던 것이다. 청중들은 깔깔 웃으며 박수로 답했다.

일본 형사들 중에는 이상재를 뒤따라 다니는 동안 그 나름 친분이 생긴 자들이 있었다. 어느 날 일본인 고등계 형사로 악명을 떨치던 삼륜이라는 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를 하자 이상재가 물었다.

“난 잘 지냈네만 자네는 어떤가?”
“감기가 걸렸는데 좀처럼 낫질 않습니다.”
“그놈의 감기는 대포로 쏘지 못하나?”

조선미술협회의 창립총회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고관들과 함께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거두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상재도 거기에 참석했는데 마침 자신이 앉은 맞은편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에 이상재가 말했다.

“대감들도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지 그러오?”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요?”
“대감들은 망하게 꾸미는데 소질이 있으니 하는 말이오. 동경에 가면 일본 망할 거 아니오?”

이상재는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유머러스했고, 남에게는 자상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는 고난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았다. 그는 그 고난을 해학으로 풀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 오히려 웃은 사람, 그가 월남(月南) 이상재였다.

불교는 철학적인 면이 강한 종교인데, 그 면에 몰두하다 보면 성정이 규격적으로 되기 쉽다. 도형에 비유하면 규격적이 된다는 것은 사각형이나 삼각형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형이 그러하듯이 사람살이에도 원(또는 타원, 별 등)으로서의 해학을 요구할 때가 있다.

바르고 올곧은 것은 좋다. 그러나 또한 사람은 눙칠 줄도 알아야 하고, 웃어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태도는 너그러움에서 나온다. 부처님이 해학을 발하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해학은 완성된 성자가 아닌, 그 바로 아래 단계에 있는 현인, 군자의 몫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넉넉하게 인정하는 마음에서 해학은 시작된다.

완성을 향해 정진하는 불제자가 되자. 그러나 해학 또한 잊지 말자. 나의 불완전함과 남들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며 껄껄 웃어넘기는 여유를 가져보자. 삶은 고달프고 힘든 것. 그 고달픔과 힘듦을 멀찍이 떼어 놓고 바라보며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리자.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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