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법
8.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법
  • 허만항 번역가
  • 승인 2019.11.05 10:44
  • 호수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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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같은 현재의 행위들이 미래 괴로움 낳는 원인”

인과에 끊임없이 말려 들어서 
그것이 상속되면 해탈은 불가 
​​​​​​​
아미타불을 어머니 생각하듯
억념하면 자신의 원력으로써
아미타 부처님의 불력과 법력
공덕력까지도 성취할 수 있어  
윈강석굴의 벽면에 조성되어 있는 시무외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
윈강석굴의 벽면에 조성되어 있는 시무외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

“제19칙 : 극락세계에는 사바세계의 여덟 괴로움이 없고 여덟 즐거움으로 바뀐다.” 

‘믿음’이란 사바세계는 참으로 괴롭고 극락세계는 참으로 즐겁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사바세계의 괴로움은 무량무변하지만 총괄하면 팔고(八苦)를 벗어나지 못하니 바로 태어나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괴로움, 오음(五陰)에 가려 불길같이 타오르는 괴로움이다.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부귀함이 절정에 이른 사람이나 비천함이 구걸에 이른 사람이나 누구든지 있다. 앞 일곱 가지는 과거세의 인으로 감득한 과보로 자세히 생각해보면 상세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다. 말해봤자 먹물과 종이낭비일 뿐이다. 여덟째 ‘오온에 가려 불길같이 타오르는 괴로움’은 현재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행위 일체가 모두 미래에 괴로움을 낳는 원인임을 가리킨다. 인과에 연거푸 말려들어 끊임없이 상속되어 과거무수겁에서 미래 겁에 이르도록 해탈할 수 없다.  

‘오음’은 곧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색은 곧 업보로 감득한 몸이고 수상행식은 곧 경계에 접촉하여 일으킨 환 같은 망념이다. 환 같은 몸과 마음 등 일체존재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법 육진(六塵)의 경계에 대해 미혹을 일으켜 업을 지음이 불길같이 맹렬하여 멈출 줄 몰라서 “불길같이 일어난다”고 한다. 또한 ‘음(陰)’은 뒤덮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음이 존재하여 진성을 뒤덮어서 그것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리면 비록 햇빛이 눈부시게 비추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지라도 구름에 가려서 만물이 햇빛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범부중생이 혹업(惑業)을 끊지 못하고 이 오음의 장애에 뒤덮여 진여본성의 지혜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다. 이 여덟째 괴로움이야말로 일체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선정의 힘이 깊어 육진경계에 대해 조금도 집착하지 않아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이 기초 위에서 가행정진으로 수행하고 나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혹업은 전부 다하고 생사윤회의 근본은 끊어진다. 이러한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아 요즘 같은 말세에는 증득하기가 실로 어렵다. 그래서 모름지기 정업(淨業)을 전수(專修)하여 극락에 태어나길 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원력에 기대어 서방에 왕생하여야 한다. 즉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연꽃에 화생하여 태어나는 괴로움이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수명 등이 허공같이 무량하고 몸에는 재앙으로 인한 변고가 없으며 늙음 병듦 죽음 등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것이 실제 존재하겠는가?

극락세계에서는 성중을 뒤따라 아미타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물과 새와 숲에서 모두 법음이 연설되어 자신의 근성(根性)을 따라 법문을 듣고 각자 증득함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도 마침내 없거늘 하물며 원수에 대한 미움이 있겠는가?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으며 누각당사는 모두 칠보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모두 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화현한 것뿐이니 곧 사바세계의 일곱 괴로움은 극락세계에서 일곱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 각자의 몸에는 모두 큰 신통력과 큰 위신력이 갖추어져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나지 않은 채 일념 가운데 시방제불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갖가지 불사를 지어 위로는 불도(佛道)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마음에는 곧 큰 지혜와 큰 변재를 지녀서 일법 가운데 제법실상을 두루 알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해도 잘못됨이 없고 비록 세간의 언어로 말해도 모두 실상의 미묘한 이치에 들어맞을 수 있다. 오음에 가려 불길같이 일어나는 괴로움이 없고 몸과 마음이 적멸의 즐거움에 머문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시길 “저 국토의 중생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없고 오직 온갖 즐거움만 누리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극락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사바세계의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극락세계의 즐거움은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다.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어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진실한 믿음이라 한다. 부디 범부 외도의 지견으로써 제멋대로 추측하여 “극락정토의 갖가지 불가사의하고 수승 미묘한 장엄은 모두 우화나 신화로 마음에서 생각해 낸 것이지 결코 실제 존재하는 경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말라. 만약 이러한 삿된 앎, 그릇된 견해가 있다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실제 이익을 잃고 말 것이니 그 위험과 해로움이 얼마나 큰지 결코 몰라서는 안 된다.   

“제20칙 : 아미타불은 우리 마음속 부처이고 우리는 아미타불 마음속 중생임을 알라.”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광대한 원행을 일으켜서 중생을 접인하여 왕생 성불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아미타 부처님의 행원에 어긋나게 살며 오랜 겁 이래로 모두 육도윤회하면서 영원히 중생노릇을 하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계신 부처님이고 우리는 아미타 부처님 마음에 있는 중생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비록 하나일지라도 범부와 성인은 하늘과 땅 만큼의 큰 차이가 있으니 이는 모두 우리가 한결같이 미혹 전도되어 진심을 등지고 여윈 까닭이다. 

이러한 신심이 있어야 비로소 진실한 믿음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신심의 기초 위에서 이번 생에 결정코 서방극락에 왕생하겠다고 발원하고 결정코 염불하겠다는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정토종의 법계에 들어가 생사를 완전히 벗어나는 대사를 이번 생에 마치고 곧장 범부의 몸을 뛰어넘어 여래의 경계로 곧장 들어갈 수 있으니 마치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만나 영원히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같다 말할 수 있다. 

“제21칙 : 염불은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염불, 이 일 하나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미 생사윤회를 완전히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생사윤회의 고통에 대해 저절로 싫어하고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겨나고 서방극락의 즐거움에 대해 저절로 기뻐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으면 믿음과 발원 두 가지 법이 지금 이 자리, 일념 가운데 원융하게 갖추어진다. 

게다가 뜻과 정성이 간절하여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아미타 부처님을 억념하면 아미타 부처님의 불력과 법력, 우리 자심의 믿음 발원으로 성취한 공덕력, 이 세 가지 법이 원융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치 밝은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어 설사 안개가 짙게 드리우고 얼음이 두껍게 얼었을지라도 머지않아 녹아내리는 것과 같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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