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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㉞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⑬

태종무열왕 사후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식 묘호와 시호 사용

진덕여왕 사후 알천 누르고
김춘추가 29대 왕위에 올라

무열왕으로 즉위한 직후부터
왕위 계승 정통성 강화 조치

아버지를 용춘 문흥대왕 추봉
독자 왕통에 대한 의지 보여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합세
백제 멸해 삼국통일 발판마련

​​​​​​​사후에 한식 시호시대 열어
불교식 왕명시대와 구분 돼

보물235호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보물235호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28대 진덕여왕은 즉위 8년(654) 3월에 사망하고, 김춘추가 뒤를 이어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대 국내정치와 대당외교의 실권을 장악했던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왕위계승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로서 알천(閼川)이 있었는데,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에 있었다. 

‘삼국유사’ 권2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때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알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武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이 자료는 설화적 형태이지만, 당시 최고위 귀족들의 회의에서 알천이 최연장의 원로로서 수석의 위치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실세는 김유신이었던 사실을 전해준다. 무열왕 즉위 당시 김춘추는 52세, 김유신은 60세였던데 견주어 알천은 김유신에 앞서 선덕여왕 초년에 대장군으로서 백제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사실을 고려하면, 70세 이상의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즉위년조에서는 무열왕의 즉위과정을 좀 더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사양하며 말했다. ‘나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마침내 김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그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 자료는 김춘추 입장에서 남겨진 기록이기 때문에 실상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진덕여왕이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은 채로 죽자, 최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제1순위의 왕위계승자로서 알천이 물망에 올랐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의 지지를 받은 김춘추로 교체되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 권42 김유신전에 의하면, “영휘 5년(654) 진덕대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유신은 재상 이찬 알천과 논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이하여 즉위케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라고 하여 김춘추의 추대를 주도한 인물이 김유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의 인척관계를 이룬 특별한 사이였다. 진덕여왕대 김춘추는 대당외교와 국내정치를 주도하였고,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하여 백제와의 치열한 전투를 전담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2년(648)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당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관직을 임명받았는데, 특진은 정2품의 문산관(文散官) 벼슬로 진덕여왕 원년(647) 선덕여왕에게 추증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산관 종2품), 진덕여왕에게 책봉된 주국(柱國, 勳官 종2품)과 낙랑군왕(樂浪郡王, 爵號 종1품)보다 높은 품계의 관직이었다. 이로보아 김춘추는 이미 진덕여왕대부터 국왕인 진덕여왕 이상의 평가와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춘추의 아들 문왕(文王)・법민(法敏)・인문(仁問) 등이 연이어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문왕과 인문은 당으로부터 종3품의 무관직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과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으로 각기 임명되었다. 특히 인문은 ‘삼국사기’ 권44 김인문전에 의하면 진덕여왕 5년(651) 23세의 나이로 처음 입당 숙위한 때로부터 일곱 번 당에 들어가고 당 조정에 숙위(宿衛)한 연월을 계산하면 무릇 22년이나 된다고 한 바와 같이 진덕여왕대부터 무열왕대・문무왕대까지 대당외교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삼국통일의 최고 공로자로서 군사 분야에서는 김유신, 외교 분야에서는 김인문으로 평가될 만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김춘추는 29대 무열왕(654~661)으로 즉위 직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원년(654) 4월 죽은 아버지 용춘(용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용춘은 ‘삼국사기’ 권5 태종 무열왕 즉위년조에서 이찬의 관등을 소유했던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 권1 왕력 태종무열왕조에서는 각간(角干)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을 소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추측컨대 용춘은 25대 진지왕의 아들이자 26대 진평왕의 4촌 형제로서 진평왕 44년(622) 대궁・양궁・사량궁 등 3궁을 통합 관리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고,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주관하는 등 왕실의 실력자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갈문왕의 책봉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용춘은 김춘추가 즉위하기 이전, 황룡사 9층탑을 조성한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진지왕이 사망한 때가 579년이었음을 고려하면 7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생존해 있던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책봉되었는데, 그녀는 바로 진평왕의 딸로서 용춘과는 5촌 당숙질의 관계였다. 또한 즉위 2년(655)에는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책봉하고, 나머지 아들 가운데, 문왕을 이찬, 노차(老且)를 해찬(파진찬), 인태(仁泰)를 각찬(각간),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이들 가운데서 뒷날인 문무왕대 지경의 관등이 파진찬, 개원의 관등이 대아찬 등이었던 것을 보아 기록상의 착오가 있는 것 같다.)  7명의 아들 가운데 김인문이 빠진 것은 당시 당에 사신으로 가서 숙위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왕의 딸 지조(智照)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는데, 김유신은 당시 61세의 고령으로서 생질녀를 부인으로 맞은 것이었다. 다분히 정략결혼의 성격을 띤 것으로써 중첩적인 혼인을 통하여 왕실의 외연을 더욱 굳건하게 하려는 의욕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종합해 볼 때, 용춘-춘추의 가계는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의 가계와 밀접히 연결된 혈연관계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행보에서도 친왕파의 일원으로 활약해 왔었다. 그러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이후 전왕의 가계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왕통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열왕은 즉위하면서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강구하였다. 즉위한 4월에 먼저 죄수를 사면하였고,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히 살펴서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가다듬어 제정케 하였다. 신라에서 모범으로 삼은 당나라의 율령에는 율(律)・영(令)・격(格)・식(式) 등 4종류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율과 영으로서 율은 형벌법, 영은 행정명령, 또는 행정규정이다. 

그에 견주어 격은 때에 따라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집성한 법전이고, 식은 율령 시행상의 세칙규정을 집성한 것이다. 신라에서 제정한 이방부격 60여조는 이름으로 보아 이방부에서 왕명들을 모아 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각 관서와 관료의 업무, 특히 관리의 감찰과 사정 업무를 담당한 이방부에서 시행할 업무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당나라의 율령격식(당 태종 정관 11년의 貞觀律令格式이나 당 고종 영휘 2년의 永徽律令格式)을 받아들임으로써 법흥왕 7년(520)에 제정된 율령을 현실에 맞게 전면적으로 재조정한 것으로 본다. 

무열왕 2년(655)부터는 계속적인 인사 개편을 시행하여 행정체계를 정비하였다. 먼저 2년 정월에 이찬 금강(金剛)을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파진찬 문충(文忠)을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중시에 각각 임명함으로써 양대 최고위직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3년(656)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아들 김인문을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에 임명하여 장산성(獐山城, 경북 경산시 일대)을 축조하는 일을 감독케 함으로써 수도권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5년(658)에는 중시 문충을 아들 문왕으로 교체하여 친정체제로 재정비하고, 이어 6년(659) 8월에는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으로 삼고, 7년(660) 정월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아 백제를 총공격하기 위한 체제정비로서의 최고위 인사를 완료하였다.

한편 무열왕은 대당외교를 무엇보다도 중시하여 즉위하자마자 전왕인 진덕여왕이 당나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 받게 하고, 자신 역시 개부의동삼사와 함께 신라왕으로 책봉케 하였다. 진덕여왕과 무열왕이 받은 종1품의 문산관(文散官)의 벼슬과 정1품의 작호(爵號)는 그 이전의 왕들에 비해 품계가 한 단계 높아진 것으로서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그만큼 상승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열왕 3년(656) 당에서 숙위하던 김인문이 귀국하자, 문왕을 대신 보내었다. 문왕은 진덕여왕 2년(648) 아버지를 따라 당에 가서 좌무위장군을 제수받고 숙위로 머문 적이 있었다. 또한 무열왕 2년(655)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지역 33성을 탈취하자, 당에 구원을 요청하여 요동으로 출병케 한 바 있으며, 6년(659)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해 오자, 숙위하러 당에 가는 김인문으로 하여금 군사를 요청토록 하였는데, 그 때 김인문이 가지고 간 청병의 외교문서는 명문장가인 강수(强首)가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신라의 청병요청에 대한 당의 회보가 늦어지자 노심초사하고 있던 무열왕에게 앞서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의 영혼이 나타나서 다음해의 당군 출병을 예고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뒷날 그 보답으로 북한산에 장의사(莊義寺)를 창건해 2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무열왕 7년(660) 상대등 김유신・병부령 진주 등 신라군을 총동원하여 당의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인솔한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무열왕은 백제의 부흥군의 진압과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던 중 8년(661) 6월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묘호(廟號), 무열왕은 시호(諡號)로서 죽은 뒤에 올린 이름이었다. 신라의 역사에서 최초로 사용된 한식(漢式)의 묘호와 시호였다. 이른바 한식 시호시대(漢式 諡號時代)를 열게 함으로써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시기의 불교식 왕명시대와 구분 짓게 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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