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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옹선사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금강 같은 믿음과 무쇠 원력, 차별 없는 대자비심”

친구 죽음 겪으며 큰 의문 품고
삶의 모든 고통 여의고자 발심
부처님 칭송 받던 스님이 인가
화두뿐 아니라 칭명염불도 강조

‘행선축원’을 지은 나옹선사는 강월헌에 머물렀다 해서 강월존자라고도 불린다. 여강을 굽어보고 있는 강월헌과 탑.
‘행선축원’을 지은 나옹선사는 강월헌에 머물렀다 해서 강월존자라고도 불린다. 여강을 굽어보고 있는 강월헌과 탑.

새벽 산사의 아침 예불시간에 빠짐없이 들려오는 발원문이 있다. 바로 ‘행선축원(行禪祝願)’이다. 참선하는 이가 발원을 올리는 내용이다. 선을 닦는 수행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 갈 것인지, 나라와 세상의 평화와 온 생명을 구제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기울일 것인지 그 마음가짐이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그 서두를 들어보자.

“아침저녁 향과 등불 부처님 전 올리옵고/삼보 전에 귀의하여 공경예배 하옵나니//우리나라 태평하고 온갖 재앙 소멸되며/온 세계 평화롭고 부처님 법 이뤄지이다.”

행선축원의 ‘발원문’은 고려 말의 뛰어난 선승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지은 것이다. 그는 강월헌(江月軒)에 머물렀다 해서 강월존자라고도 불린다. 강월이란 강에 비친 달이다. “강 위에 달 밝고 솔 사이 바람 맑으니”라는 ‘증도가’의 노래도 있듯이, 그것은 마음에 비친 붓다의 모습이 아닐런가? 붓다의 참모습은 텅 비어 찾을 길 없지만 물 속 달처럼 부르면 벌써 달처럼 비쳐온다. 그에게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마음, 무상, 산사와 자연의 정경, 수행 등을 노래한 ‘가송(歌頌)’ 1권이 전한다.  

나옹선사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관서령(饍官署令)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였다. 20세 때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후 삶과 죽음에 대한 큰 의문을 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뿐이었다. 이 무상감에 대한 절망과 슬픔을 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문경에 있는 공덕산(지금의 사불산) 묘적암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한다. 나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가사체 노래 ‘서왕가(西往歌)’에 그가 바란 출가의 뜻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나도 한때 속세사람 자식이언만/무상함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거짓일세//부모님이 주신 얼굴 죽은 후에 속절없다/다시 깊이 생각하여 속세의 일 뿌리치고//부모님께 하직하고 표주박 하나 누더기옷에/명아주 지팡이로 명산을 찾아 들어//선지식을 친견하여 이 마음을 밝히고저/천 개 경전 만 가지 논서 하나하나 탐구하리.”

요연 스님이 물었다. “왜 출가를 하려고 하는가?” 그가 답한다. “괴로움 투성이인 이 삶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입니다. 부디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길을 찾아 나옹은 선지식에게 묻고 자신에게 답하며 수행에 전념한다. 그 수행법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박탈해 나가는 간화선이었다. 

고려 말은 무신정권이 물러간 원나라 지배기다. 불교 또한 쇠잔해 가며 신진사대부들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는 시기였다. 보조국사가 펼친 조계선풍이 가물가물 이어지긴 했지만, 강하진 못했다. 그래서 나옹은 선의 불길을 다시 지펴 불교를 쇄신해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고자 한다. 치열한 수행 끝에 양주 회암사에서 깨닫는다. 

그는 깨달음을 인가받고자 원나라로 들어간다. 27세 때의 일이다. 그는 청장년기인 10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며 당대의 선지식 평산처림(平山處林),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신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인가를 받는다. 당시 지공선사가 머물렀던 법원사에는 쟁쟁했던 고려 스님들이 많았지만, 나옹만이 특출했고 기개가 뛰어났다. 곧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중국의 황제에게도 알려진다. 그는 연경(북경)의 광제사 주지로 발탁되어 개당법회(開堂法會)의 법주가 된다. 그가 강조한 건 어디서건 주체로서 살라는 것이었다. 그 주체는 안의 안에도 없고 밖의 밖에도 없지만, 없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이 자리에서 피어난다. 뜰 앞의 잣나무처럼. 강 위의 달처럼.  

나옹은 고려로 돌아온다. 당시는 공민왕이 집정하던 시기였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천명하고 신돈을 신뢰하며 개혁정책을 펼쳤다. 태고보우 선사도 당시 왕사로 활약했지만, 신돈에게 밀려나기까지 한다. 불교계 또한 세력 싸움이 거셌던 것이다. 원나라에 쫓겨 홍건적이 고려로 밀려왔다. 공민왕은 나옹에게 신광사 주지를 맡긴다. 신광사 대중들은 홍건적이 절에 들어와 행패를 부릴까 두려워하지만 나옹만이 두려운 빛이 없이 그들을 대한다. 그들의 수뇌가 스님께 침향 한 조각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50세 때 그는 천태종, 화엄종, 조계종 등 교계의 대표가 참여하는 공부선(工夫選)을 주관하여 불교계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이 공부선은 승과(僧科)를 통해 훌륭한 스님을 발탁하는 자리였다. 이 공부선에서 그는 스님들의 안목을 묻는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본다.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를 벗어날 수 있는가?”

그는 공부를 꼭 이루고자 하거든 자신의 본래 성품에 대한 부서지지 않은 믿음과 깨지지 않는 무쇠 같은 원력을 간직하고 화두를 빈틈없이 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대자비의 실천이었다. 그의 ‘발원문’을 보자.

“저희들이 이와 같이 세세생생 날 적마다/반야지혜 좋은 인연 물러나지 아니하고//우리 본사 세존처럼 용맹하신 뜻 세우고/비로자나 여래같이 큰 깨달음 이뤄지다.//문수사리 보살처럼  깊고 밝은 큰 지혜와/보현보살 본을 받아 크고 넓은 행원으로//넓고 넓어 끝이 없는 지장보살 몸과 같이/천수천안 관음보살 삼십이응 몸을 나퉈//시방삼세 넓은 세계 두루 돌아다니면서/모든 중생 제도하여 열반도에 들게 할제//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내 모습을 보는 이는 생사번뇌 해탈하며//백천만겁 지나면서 이와 같이 교화하여/부처님도 중생들도 모든 차별 없어지이다.”

나옹은 염불 또한 강조했다. 하나는 염불선이요 다른 하나는 칭명염불이다. 염불선에 대한 나옹의 안목은 우리 사찰의 주련에서 자주 만난다.   

“아미타부처님 어느 곳에 계시온가/간절히 마음속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생각하고 생각하여 마음 다한 곳에 이르오면/이 몸에서 자금색 광명 항상 빛나리.”

나무아미타불. 그 명호를 부르고 불러 그 생각마저 끊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 부처님이 현신한다는 말이다. 마음에 달이 뜨는 것이다. 생각이 다하도록 염불해 보시라. 감흥과 체험 깊을 것이다. 그는 ‘서왕가’에서 타력염불 또한 강조한다.  

“백년 탐한 재물 하루아침 티끌이요/삼일 염불 백천만겁 다함없는 보배로다//아아! 이 보배는 천겁 지나도 낡지 않고/만세를 지나 언제나 지금이로다.”

나옹은 말년에 왕사를 책봉 받아 송광사 주지를 거쳐 회암사에 머물러 그 사세를 확장하고 낙성법회를 연다. 그곳으로 수도권과 지방의 백성들이 밤낮없이 구름처럼 물밀 듯 몰려왔다. 위기의식을 느낀 사대부들의 모함으로 우왕은 그를 회암사에서 물러나게 한다. 영원사로 향하던 중 나옹은 신륵사에 잠시 머물다 열반에 든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하지만 그의 법맥은 무학자초, 함허득통으로 이어져 조선시대 불교의 등불을 이어간다. 또한 나옹은 한때 환암혼수와 오대산에 머물며 그와 법을 나눈다.  

여주 신륵사에 가면 남한강을 바라보며 강월헌이 서 있다. 회암사 강월헌이 그곳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를 보러 빛깔 좋은 날, 달 밝은 밤 강월헌에 가 보자.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13호 / 2019년 1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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