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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기해년 동안거 결제 법어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9.11.19 16:14
  • 수정 2019.11.21 17:45
  • 호수 1514
  • 댓글 0

“바른 몸과 마음으로 혼침·산란 녹여야”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여러분, 지금 앉아서 조용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드디어 금년도 삼동(三冬) 결제, 이날에 당도했구나.’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하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과거는 끝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시겁래(無始劫來)라고 표현합니다. 끝없는 과거로부터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일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부딪혀보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뜻대로 되고 뜻대로 되지 않고 이러한 일들이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인연인지, 아마도 선근(善根)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불법을 만나 자신도 부처님과 같이 생사 해탈을 하겠다고 하여 출가하고 불문에 들어와서 자기 나름대로 경전도 보고 법문도 듣고 생각도 많이 하고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경험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지금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얻었다는 말은, 무엇을 확인했느냐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경전을 보며 내리는 결론은 바로 불교는 남의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말은, 몸이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하고 마음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바르고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어떤 것이 바르지 못하고, 어떤 것이 바른 것입니까? 분명하게 흑백을 가려내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 생활 속에서 움직이고 일도 하고 온갖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점검하려면 일단 모든 움직이고 있던 모습을 조용히 하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몸을 바르게 하라는 뜻은 어떤 모습입니까? 몸이라고 하는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움직이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고 앉아 있을 때도 있고 누워 있을 때도 있고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검을 하려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서 있는 것보다 앉아서 조용히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몸이 바르다고 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가장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모델인 부처님의 모습을 봅시다. 부처님이 앉아 있는 모습은 결가부좌입니다. 왜 결가부좌입니까? 그냥 앉아 있으면 허리가 자꾸 구부러집니다. 그것을 양쪽 발, 혹은 한쪽을 내리면 반가부좌라고 합니다. 그렇게 가부좌를 해서 허리를 딱 펴고 앉아 봅니다. 몸의 가장 높은 곳은 머리입니다. 가장 낮은 곳은 발입니다. 중심은 허리입니다. 앉아 있을 때 약간 뒤를 높여 주고 양쪽 무릎이 바닥에 닿도록 하려면 중심인 허리가 살짝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 몸의 척주는 앞과 뒤에서 볼 때는 양쪽 어느 쪽으로도 비틀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옆에서 볼 때는 허리가 살짝 들어가서 영문 알파벳 에스(S)의 모양이 됩니다. 이 자세는 앉아 있을 때 가장 터득하기가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는 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 이 자세를 터득하면 서 있을 때 걸어갈 때 식사할 때 움직일 때도 허리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몸을 보면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나이가 든 사람들도 그렇고 일상생활에 바쁘다 보니까 정신없이 일에 쫓겨 다녀서 몸이 흐트러지고 자세가 바르지 못합니다. 예부터 몸이 바르면 일체 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몸에 병이 있거나 무엇인가 이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몸의 어딘가 비틀어져 있거나 굽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약을 먹고 해도 낫지 않습니다. 근본인 몸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세만 바로 하면 그렇게 애를 써서 노력해도 낫지 않던 병이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부좌 자세가 바른 사람은 걸어갈 때도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걷습니다. 요즘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느라 쫓기고 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마치고 나면 본 자세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익숙해지기까지는 잘 안되기도 하겠지만 조금씩 또 조금씩 하게 되면 중심이 바로 잡힙니다. 그러면 옛말에 배꼽 밑이 단전(丹田)이라고 해서 기운의 바다, 기해(氣海)라고 했습니다. 단전이 따뜻해지면 배꼽 위가 들어가고 아랫배가 나옵니다. 모든 기운이 여기에 모인다고 합니다. 단전에 기운이 충만하면 일체 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몸이 고장이 났다든지 병이 난 사람은 아랫배가 쑥 들어가고 윗배가 나온 경우가 있습니다. 자세가 바르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앉아 있는 이 자세를 바르게 터득해 놓으면, 일상생활에서 바쁘게 일하다가도 피곤하면 딱 털어버리고 가부좌 틀고 조용히 있어 봅니다. 바른 자세를 할 때 모든 근심 걱정도 없어지고 몸도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를 회복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터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터득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앉으면 되겠구나.’ 해서 앉는 자세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닦는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몸과 마음을 닦는다.’라고 했습니다. 몸은 어떤 몸입니까? 지금 앉아 있는 이 몸을 닦는 것입니다. 남의 몸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허리가 구부러졌다, 비틀어졌다면 바로 하면 될 것입니다. 바로 되었으면, 이제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마음 역시 각자 자기 마음입니다.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눈뜨고 앉아 있어 보면, 모든 물체가 보입니다. 그래서 ‘아, 내가 법당 안에 앉아 있구나.’ ‘밖에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가 들려오는구나.’ 이렇게 바깥의 소리를 소리인 줄 알고, 빛인 줄 알고, 냄새인 줄 아는 놈이 자신이요 마음입니다. 다른 놈이 아닙니다. 귀신이 와서 보고 있거나 다른 혼이 와서 소리 듣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있는 것도 자신이요, 듣고 있는 것도 자신이요,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줄 알고 답답하면 답답한 줄 알지요. 괴로우면 괴로운 줄 알지요. 이것을 아는 놈이 누구이겠습니까?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 걱정, 답답하다면 마음이 바르다고 할 수 없지요. 괴로움도 없어지고 답답함도 없어지고 불안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세가 비틀어지면 자세를 바로 하듯이 나의 마음이 지금 잘못된 점이 있는지 없는지 눈을 딱 뜨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을 때 누구든지 앞에 물체가 있는 줄 압니다. 푸른 산을 보면 푸른빛이 보일 것이고 벽을 대하고 있으면 벽이 보일 것입니다. 이때 귓전에 목탁 소리나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면, 귀가 고장 난 것이 아닌 이상 ‘아, 종소리가 나는구나.’ ‘목탁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아는 것이 자신이요, 이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벽을 딱 보고 있을 때, 이상이 없는 사람은 벽이 그대로 보일 것입니다. 여기에 복잡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벽을 보고 있을 때 마음에 충격을 받아서 감정이 일어나거나 복잡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제일 가까운 벽이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속이 생각으로 흔들리는 것을 산란심이라고 합니다. 벽이 눈에 들어오게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눈앞의 벽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바로 쓸데없는 번뇌 망상, 근심 걱정입니다. 그리고 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이 오면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잠이 오지 않고 산란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울에 물건을 비추듯이 나의 마음에 눈앞의 모습이 보입니다. 푸른 산이 있으면 푸른 산이 보일 것이고 바다가 있으면 바다가 보일 것이고 벽이 있으면 벽이 보입니다.

이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자기 마음이겠습니까? 보고 있는 것이 나의 마음이요,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이 나의 마음입니다. 소리도 내가 아니고, 눈앞의 물체도 내가 아닙니다. 소리도 났다가 없어지고 물체도 오면 가고 냄새도 나면 사라지지만, 냄새인 줄 알고 물체인 줄 알고 소리인 줄 아는 놈은 같이 생기거나 같이 없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밖으로 오고 가는 것은 객입니다. 주인은 보고 듣는 놈입니다. 주인은 소리가 나면 그래도 받아들이면 되고 가버리면 안녕히 가십시오 할 것도 없이 그대로 가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 주인이 바깥의 손님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소리는 이미 지나갔는데 여전히 지나간 소리 작용이 마음속을 점령했다고 하면, 이전까지 잘 보이던 벽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산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간 소리랄지 물체가 짓밟고 간 흔적투성이입니다. 이것을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합니다.

누군가 욕을 했다고 하면 그 소리가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괴롭거나, 누군가 칭찬을 했는데 이미 지나갔는데도 기분이 좋다거나 하는데 메여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분이 좋으면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나쁘면 괴롭고, 이것은 산란심입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즐겁거나 괴롭습니다. 마음이 흔들려서 위험천만입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산란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도,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만 몸이 아닙니다. 움직여도 자기 몸이고 엎어져도 자기 몸이고 비틀어져도 자기 몸이고 병들어도 자기 몸입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중에 가장 좋은 몸이 건강한 몸입니다. 건강이라는 것은 움직일 때는 잘 움직이고, 동작할 때는 동작하되 동작이 끝나고 나면 동작했던 흔적도 없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건강한 몸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뿐만 아니라 움직일 때는 신나게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가 되면 건강한 몸이라고 하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근심과 걱정이 가득합니다. 살아가려면 이래야 하는지 저래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도인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마음을 깨닫는지, 이처럼 생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도인은, 그 많은 생각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좋다고 하고 나쁘다고 하는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생각이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생각이 일어난 자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것을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합니다.

생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각자 생각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생각입니다. 감정도 그렇고 욕심도 그렇고, 공부해야 하겠다는 것 역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 움직이지 않는 본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파도가 일어나고 있을 때 파도는 물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파도의 본체는 물입니다. 파도가 일어났을 때는 파도 속에 물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동작이 없어지면 파도는 없어지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파도는 생겼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물은 같이 생기고 같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파도가 생사(生死)하고 있는 중에 물은 한 번도 생 한 일도 없고 없어진 일도 없기에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여기서 생사 속에 불생불멸이 있다는 이론이 나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것이 알고 싶어서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자 생각을 열심히 쉬지 않고 했는데 터득한 사람도 있고 아직 터득하지 못하고 이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습인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까 물과 파도를 말씀드렸는데 비유하자면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도들이 나의 본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답이 안 나왔을 때, 파도들이 “우리끼리는 안 되겠다. 어떤 선지식을 찾아가자.” 해서 선지식을 찾아갑니다. 선지식은 파도들을 향해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저렇게 했습니다, 하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선지식이 “그렇게 해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일러주는 대로 하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파도들은 “네. 그렇게 하고자 찾아왔습니다.”하고 답을 합니다. 선지식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몸부림치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모두 집어던져 버려라.” 파도들은 “이상하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 하는데 집어던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지만 들었으니 할 수 없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자. 잘못되어도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으니 우리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큰마음을 먹고 같은 파도끼리 쉬었습니다. 몸부림치던 파도의 움직임을 차차 없앴더니 파도가 없어지고 파도 없는 물이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도들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파도가 생겼고,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파도라고 하는구나, 파도는 쉬어도 물은 불생불멸이다.”

우리도 조용히 앉아봅시다. 여러분은 화가 날 때, 기분이 나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화가 나면 화가 나는 줄 압니까?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줄 압니까? 여러분은 모두 압니다. 그것이 자신입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기분 나쁠 때도 있고 기분 좋을 때도 있고 불안할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습니다. 전체가 마음입니다. 예를 든다면, 비틀어져도 몸이고, 자빠져도 몸입니다. 전체가 몸이지만 모든 것이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비틀어진 몸도 있고 올바른 몸도 있습니다.

이렇듯이 성내는 것도, 기분 나쁜 것도, 시기와 질투까지 전체가 마음이지만 올바른 본 모습은 아닙니다. 올바른 본 모습은 기분 나쁘다는 생각도 아니고 기분 좋다는 생각도 아니고 일체 생각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파도가 물이지만 본래 모습은 아니듯이 생각은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생각을 정체를 알려면 움직이는 동작을 쉬어버리면 움직임이 없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움직임이 아닌 마음으로 돌아와서 그 마음을 확인해 본 즉, 움직이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해되셔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을 때만 마음인 것이 아닙니다. 화내고 성내고 있을 때도 마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생각을 쉬어버리면 화내고 있을 때 화내고 있는 줄 아는 놈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기분 나쁜 것 다 사라져 버리고 조용한 가운데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앞에 푸른 산이 있으면 푸른 산인 줄 압니다. 이것이 어디 남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다만 쓸데없는 망상분별에 사로잡히니까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경전의 게송에는 ‘마음은 물드는 데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허공이 비가 왔다고 해서 젖어버리고 어둠이 왔다고 해서 캄캄하게 물들어버립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허공은 물들거나 깨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마음은 어떤 상태에 들어가도 물들지 않고 깨끗합니다. 그것을 ‘본래 스스로 원만하여 결함이 없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소리가 나면 소리가 잘 들리고 냄새가 나면 냄새인 줄 알고, 이렇게 누구든지 결함이 없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단지 망념, 쓸데없는 생각, 이렇게 저렇게 분석하고 차별하고 온갖 발광을 하지 않으면 즉 과거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성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되어 있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귀에서 소리가 날 때 소리 안 들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귀나 몸에 고장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잘 들립니다. 때리면 아픕니다. 아픈 줄 느끼는 것은 도를 깨닫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갖추어 있습니다. 이 마음을 모르고 이것 이외에 밖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생각이라는 객진번뇌에 사로잡혀서 쉴 줄 모릅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헛된 줄 안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놓고 보니 우리가 본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헤매고 있었구나 하고 나도 모르게 싱겁게 웃음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볼 때, 이것이 정말 맞는 말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몸도 바로 잡아 보고, 조용히 앉아서 눈을 똑바로 뜨고 벽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보입니다. 이때 소리가 나면 저절로 소리인 줄 압니다. 그럴 때 특별한 생각을 해서 특별한 기술을 부려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술을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스스로입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때부터 산란해집니다. 무엇 때문에 산란한가 하면 더 좋고 더 편안하고 더 행복한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잊어버리니까 괴로운 줄 모르고, 마음을 잊어버리고 나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더 무엇인가를 구하고 쫓아다니니 그때부터 생사윤회(生死輪廻)입니다. 고통이 괴로움의 원인이니 마음속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 거기에 사로잡힌 줄 아는 사람은 그때부터 딱 생각을 털어내고 쉬어버립니다. 그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입니다. 반면 생사윤회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분해 볼 때,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때리면 아픈 줄 압니다. 벌레는 보면 벌레인 줄 압니다. 찬 것이 오면 찬 줄 압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이 똑같이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요?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온갖 생각 속에 묻혀 있습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바깥에서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분석하다 보니 마음속을 생각이라는 것이 점령해버립니다. 생각은 환상입니다. 허망합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온갖 생각을 하다가도 그것이 헛된 짓인 줄 알고 탁 놓아버립니다. 마음속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을 탁 놓으니 생각 아닌 마음이 드러납니다. 생각 아닌 마음속에서 산도 보고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습니다. 그 마음을 터득한 사람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냄새인 줄 알고 소리인 줄 알면서 생각에 사로잡혀서 알지 못하는구나.’라는 것이 보입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 그러했지만, 이제는 차가우면 찰 뿐이고 소리이면 소리일 뿐이고 앞에 물체가 있으면 물체일 뿐입니다. 마음속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을 털어버리니 생각 아닌 마음이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온갖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소리를 들어도 시원하고 물체를 봐도 시원하고 냄새를 맡아도 시원할 것입니다.

그 상태를 ‘조용히 좌선하고 있으면 벽이 나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똑똑히 시원하게 보인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으면 온갖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마음속이 온갖 생각이나 환상에 점령되어 있으면 눈앞의 물체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바깥의 소리가 나도 무슨 소리인 줄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분해 볼 때, 똑같은 마음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이렇게 살아야지, 저것을 어떻게 해야지 하면서 산란합니다. 앉아 있어도 별의별 생각이 마음속에 오고 가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벽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침에 빠져버립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사람은 죽어버립니다. 왜 잠이 올까요? 마음이 산란해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쉬는 방법이 잠밖에 없습니다. 잠 속에 들어갔을 때 쉬는 것이지 깨어 있을 때는 온갖 생각을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깨어서 똑똑히 알고 있지만 산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아무리 고요하지만 혼침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혼침이 아니기에 영지(靈知)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날 때 어째서 한 사람은 소리인 줄 아는데 한 사람은 모릅니까? 똑같은 마음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졸고 있으니 알 수가 있습니까? 졸지 않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너도나도 똑같이 소리이면 소리인 줄 알고 물체가 보이면 물체인 줄 압니다. 차를 마시면 차 맛인 줄 알지만, 마음은 산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경계입니다.

일반 사람은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단풍을 구경하러 가서 안개가 끼면 답답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시원하게 붉은 단풍 노란 단풍이 보입니다. 구름에 묻힌 상태와 묻히지 않은 상태가 어떻게 같겠습니까? 푸른 하늘을 보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생각을 초월할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항상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산란합니다.

여러분, 지금 조용히 벽을 보고 있다고 합시다. 잠시 동안에는 잘 보입니다. 이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때 그 감정이 일어난 줄 알지요? 감정이 일어나면 ‘아, 내가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을 각(覺)이라고 합니다. 각이 없으면 생각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끌려갑니다. 일어날 때 알아차리는 힘으로 그 환상을 다스리면 결국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벽을 보고 있을 때 온갖 생각들이 보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래 비추어보면 차차 없어집니다. “깨달으면 다 된 것이다, 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부처와 중생이 원래 근본 자리는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부처님과 똑같지만, 반면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물건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욕하면 화가 나지요. 주먹이 올라오지요. 마음이 산란하지요. 그것이 어디 부처님과 같습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다음에 깨달음의 지혜로 산란한 생각이 많으면 산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혼침이 많으면 잠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소홀히 하다가는 한 소식했다는 것만 있지 욕심은 그대로 있습니다. 잘못하면 막행막식(莫行莫食) 하는 사람이 됩니다.

경허 스님께서도 강사를 하시다가 모든 학문을 집어던지고 오로지 자성을 깨겠다는 일념으로 화두를 열심히 들고 있다가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이 “코구멍이 없다.”라고 하는 소리에 홀연히 깨달으신 것입니다.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자신이 알고자 했던 마음이 드러나니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렇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이렇게 형편이 없구나.’ 하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悟後)의 보림(保任)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경허 스님도 계룡산 동학사 토굴에서 8년 동안 정진을 하셨습니다. 평소 욕심이 많던 사람이 깨닫자마자 그 욕심이 모두 사라지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그대로 있습니다. 그 많던 잠이 깨달았다고 해서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음의 지혜에 의지해서 차츰차츰 노력함으로써 점점 나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첫 번째 마음부터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한 다음에, 마음을 알지 못했을 때 어질러놓은 혼침과 산란함을 녹이는 일이 오후의 수행(修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음을 확인하셨습니까? 각자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자기 마음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갖 감정과 혼침이 있습니다.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아는, 차가운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이 깨달음의 힘으로 산란심에 끌리지 않도록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1월11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기해년 동안거 결제법회’에서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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