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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에 의지하라는 말의 뜻

기자명 박사

인간은 이상한 존재라서 ‘뜻’과 ‘말’이 따로 놀 때가 적지 않다.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무뚝뚝하게 군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웃으며 칭찬을 하는 일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말만으로는 상대방의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더구나 여러 가지 정황이 한꺼번에 작용하면 더 복잡해진다. 있는 그대로 보고, 거듭거듭 봐야 비로소 보일까 말까 한 것이 사람의 속내이고 ‘뜻’이다. 

얼마 전 당황스러운 판결이 나왔다. 그날 처음 만난 여성을 차에서 강간한 남성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법원의 해석이 더 당황스럽다. 식사를 하면서 상대방의 그릇에 고기를 담아준 여성의 행동을 “성관계를 은연 중에 동의한 것”이라 인정한 것. 심지어 피해여성은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의사를 밝혔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남성을 오해하게 했으니 강간죄 무죄라는 법원의 판결은 공분을 샀다.  

피해자는 고개를 젓고, 가해자를 밀치고,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그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폭행과 협박이 없었으니 성폭행 아니다”라며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성인남성이 짓누를 때 느낀 피해자의 두려움은 무시되었다. ‘고개를 젓는 정도는 저항이 아니다’는 법원의 말은 참담하다. 그러면 어느 정도여야 인정될 수 있을까? 고개가 부러져야 할까? 

다른 강간사건에서도 법원의 판결은 절망스러웠다. 피해여성은 옷을 벗기려는 가해남성에게 저항했고, 눈물을 흘렸고, 강간이 끝나자 맨발로 도망쳤다. 하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직전의 술자리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웃으며 윙크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는 것이 무죄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모텔 앞까지 가해자를 따라가서는 안 되었고, 강간 후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했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를 탓했다. 

뜻을 헤아려달라기 이전에 이미 “싫다”라고 분명히 말했어도 가해자들의 편에 선 법원은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고 ‘뜻’을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짐작했다. “아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아니라는 것이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여전히 무시당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한 설법인 ‘대열반경’ 제6권에서, 부처님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의법(四依法)’은 불자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요긴한 삶의 기준이 될 법하다. 우리가 왜 정성들여 찬찬히 관찰하고 거듭 사유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지 그 필요를 일러준다. 

“여성의 말은 안 돼요 돼요 돼요다”라는 낡고 무지한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사람은 이제는 많이 줄었다. 성관계는 서로의 합의 하에 해야 한다는 교육은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만날 때마다 아직도 이 사회는 남성의 욕망에 근거하여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유리한 상황에 따라 말에 붙고 뜻에 붙으면서, 혹은 둘 다 무시하면서 서로서로 공감하고 용서해준다. 

비슷한 시기에 일베 게시판에 올라온 피트니스 여성 모델의 사진을 보고 “육덕이다, 꼽고 싶다”는 댓글을 게재해 모욕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피트니스 모델 중 손에 꼽을 정도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 것이 인정된 것이다. 실소가 나오는 말장난이다. ‘말’에만 의지하면 이렇게 된다.

뜻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욕망과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실상을 제대로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 한 명, 하나하나의 인연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을 많이 쌓은 이라 해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간명하지만 이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가. 이 말의 뜻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14호 / 2019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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