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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법성게’ 제30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④ 십불 출현의 법성 성기

기자명 해주 스님

화엄행자 수행으로 얻은 극과의 이익이 법성성기이며 십불출현

불이 세계를, 세계가 불 지니니
거두어 지니는 뜻 기준으로 지불
 
일체 모든 법 마음 아님 없으니
단지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불

십불은 정각불에 구족돼 있는
열 가지 덕의 십신으로도 설명

​​​​​​​일용심이 부처님 지혜 마음이니
이곳이 화엄정토인 연화장찰해

비슬산 용천사. 화엄십찰.
화엄십찰. 연화산옥천사대웅전삼존불.

의상 스님이 설하신 십불중 무착불, 원불, 업보불에 이어서 넷째는 지불(持佛)이다. 

‘지불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隨順故]’란 다음과 같다. 법계의 모든 법을 비록 다함없다고 해도 만약 해인삼매로써 도장 찍어 정하면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니, 저가 나를 지니고 내가 저를 지니기 때문에 ‘따라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로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 세계를 지니니, 이 이름이 ‘지불’이다.(고기)

지불은 모든 존재가 해인삼매의 법으로서 서로 지녀 따라주므로 부처님이다. 해인은 부처님의 정각보리심해인이니 바닷물이 온갖 물상을 지니고 온갖 물상이 바닷물을 지니므로 서로 따라주는 것처럼, 부처님이 세계를 지니고 세계가 부처님을 지니므로 지불이라 한다는 것이다.

‘화엄경문답’에서 수순한다는 것은 일체 공덕이 모두 일체 행자의 해행(解行)가운데 계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불 또한 무측(無側)의 경계로 ‘법융기’에서 설명한다. 만약 한 티끌을 들면 곁이 남김없이 일어나니 일체 모든 법이 한 티끌을 따르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며 주(主)와 반(伴)이 구족해서 한량없이 자재한 도리이니, 이와 같이 듦에 따라서 거두어 지니는 뜻을 기준으로 ‘지불’이라고 이름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다.

‘열반불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永度故]’란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갔다’라고 한다. 이른바 생사가 시끄럽게 요동함이 아니고 열반이 평온하게 고요함이 아닌 것이 이 뜻이다.(고기)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서 생사에 빠질 일이 없고 다시 옮겨 갈 곳도 없다. 그래서 영원히 건너간 것이다.(법융기) 시끄럽고 고요함이 둘이 아니라 본래 오고 감이 없어서 일체 공덕이 적멸함을 관하면 열반불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화엄경문답)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가 열반일 뿐 아니라, 일체 공덕 또한 적멸함이 열반임을 알 수 있다. ‘생사열반상공화’를 요달해 알면 곧 열반불인 것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다.

‘법계불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無處不至故]’란,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여는 지나간 때에도 없어지지 않으며, 뒤의 때에도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래도 또한 이러하여 과거에도 없어짐이 없으며, 미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도 움직임이 없다. 형태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허공계와 같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백천만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 설하여도 끝내 다할 수 없으며, 가장자리가 없기 때문에 ‘법계불’이라고 한다. (고기)

티끌과 소나무와 밤나무 등 법계의 일체 존재가 다 부처님의 몸인 것이 법계불이다. 진여가 거래 생멸이 없고 부동인 것 같이 여래도 그러하다. 부처님이 이미 설하셨고 지금 설하시고 당래에 설하신다고 함은, 시방삼세에 두루하신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법융기’에서는 낱낱 법이 들고 잡음에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을 ‘법계불’이라 하고, ‘화엄경문답’에서는 일체 공덕이 다 법성과 상응하기 때문에 일체 법이 시방삼세의 모든 곳에 무진한 뜻을 법계불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체 공덕과 상응한 법성은 원융하고, 원융한 법성신은 또 다양한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일체 법계 존재가 법계불인 것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다.

‘심불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安住故]’란,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息心卽佛]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이 아니다[起心非佛].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물이 깨끗하면 그림자도 밝고 물이 탁하면 그림자도 어두우니, 심법(心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두렷이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하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면 법계의 모든 법이 내 오척 되는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고기)

이처럼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심불이라 함은 크게 두 가지 면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을 쉬면 부처님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좀처럼 쉬어야 할 망상심을 쉴 줄 모르니, 마치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본래 불기(不起)인 그 깨끗한 마음이 내 오척되는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 그대로 편안하니,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면 법계의 모든 법이 내 오척 되는 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공덕의 모든 상이 다 심불이다.(화엄경문답) 

‘법융기’에서는 일체 모든 법이 마음 아님이 없으니 단지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불’이며, 그 마음은 성기심(性起心)과 조림심(稠林心) 등이니 일체 모든 법이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음이 바로 곧 이 ‘마음’이기 때문에 편안히 머무른다고 한다. 성기심은 여래성기구덕심으로서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만덕을 구족한 지혜의 마음이며, 조림심은 일승 가운데 여러 가지(種種) 마음이라는 뜻이다. 마음 아닌 사물이 없는 것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다.

‘삼매불이니 한량없고 집착 없기 때문이다[無量無着故]’란, 해인삼매의 법은 들고 들며 잡고 잡음에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고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고 하는 것이다.(고기)

하나의 삼매를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만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음’이며, 한량없음에 나아가 하나하나의 법마다 듦에 따라서 곁이 없기 때문에 ‘집착 없음’이니, 삼매에 의거하여 법을 보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삼매불이다.(법융기) 이러한 삼매와 일체공덕이 상응하는 까닭에 삼매불이라 한다.(화엄경문답)

‘화엄경’에는 백천삼매가 설해져 있는데 그 모든 삼매가 총정인 해인삼매에 포섭되며, 이 해인삼매의 법이 다 삼매불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다.

‘성불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決定故]’란, 법성에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큰 법성[大性]과 작은 법성[小性]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 삼세의 끝까지 다하면 안도 없고 밖도 없으므로 ‘큰 법성’이라고 한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 가운데 두루하여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하나의 기둥이 법계의 끝을 다하도록 다만 기둥인 것은 ‘큰 법성’이라고 이름하고,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와 대들보와 기둥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고기)

‘성(性)’이란 머무름 없는 법성이고 법성은 바로 일체 공덕이다. 일체의 법과 법이 모두 머무름이 없으므로 대성과 소성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기둥이 법계 일체의 기둥인 것은 대성이고, 하나의 기둥에 서까래와 대들보 등의 지위가 다 나타나는 것은 소성이다. 제법의 이러한 성품을 기준으로 부처님의 명호로 삼은 것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다.

‘여의불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普覆故]’란 다음과 같다. 마치 큰 용왕이 큰 보왕(寶王)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으므로 다섯 곡식과 아홉 곡식과 천 가지 만 가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왕의 덕인 것처럼,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다.(고기)

여의보왕은 중생을 성장시키려는 부처님의 본원으로 인해 생겨나며, 일체 중생이 성장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다 여의불이 덮어주고 길러주는 덕(德)이라 한다.(법융기) 널리 두루 덮는다는 것은 일체 공덕이 뜻을 따르고 근기를 따라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화엄경문답) 

본원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는 일이 자재함을 여의불이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십불은 시성정각하신 정각불에게 구족되어 있는 열 가지 덕[十德]의 십신으로도 말씀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구래불은 십불이고 법성신의 신통이 십불의 출현이다. 이러한 부처님을 관해 보는 것이 관불(觀佛)이고 견불(見佛)이다. 화엄행자가 수행을 통해 얻은 극과의 이익이 바로 법성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 법성 성기(法性性起)의 십불 출현(十佛出現)인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마음이 본래 나의 마음이니, 마음 외에 불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몸과 마음인 오척신이 곧 법성신으로서 자체불이다. 우리 모두 또한 부처님의 마음까지 쓸 수 있다. 내가 나날이 쓰는 일용심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마음이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법성토(法性土)로서 화엄정토인 연화장찰해인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14호 / 2019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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