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광명회복과 염불법문
11. 광명회복과 염불법문
  • 허만항 번역가
  • 승인 2019.11.26 09:59
  • 호수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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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정토법문만 닦고 전수하라”

중생의 습기, 치우친 부분 많아
어리석은 자, 용렬함에 기울고 
지혜로운 자, 고상함에 치우쳐 

자기견해만 믿고 정토 경시 땐 
겁에 이르도록 악도 빠지게 돼
중대 사자암 불자들이 201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오대산 적멸보궁 앞에서 철야정진을 하고 있다.
중대 사자암 불자들이 201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오대산 적멸보궁 앞에서 철야정진을 하고 있다.

“제28칙 : 염불법문은 광명을 회복하는 가장 긴요한 법이다.”

사상(事)과 이체(理), 체성(性)과 행상(相), 공유(空有)와 인과 등 이들 개념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리석은 촌부도 배우려고 하면 착실히 염불하면 되지만 지극한 공경심으로 오르지 성실하고 간절하게 염불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 업이 사라지고 지혜가 나타나며 장애가 다하고 복덕이 높아져서 이전의 의심이 철저히 떨어져 나간다. 그때 이르러 부처님의 유무나 자신의 유무,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는 방도나 저 언덕에 이른 확실한 증거 등 이러한 문제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마음을 쏟고 의지를 다해 염불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진상을 찾으려하면 이는 ‘금강경’을 보아도 실상을 알지 못하고 ‘정토문(淨土文)’이나 ‘서귀직지(西歸直指)’를 보아도 신심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업장이 마음에 있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맹인이 태양을 보는 것처럼 태양은 물론 하늘에 있고, 눈을 사용해야 볼 수 있지만, 그는 광명의 상을 볼 수 없어 그에게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 만약 눈이 광명을 회복하여 본다면 태양을 볼 수 있다.

염불법문은 바로 광명을 회복하는 가장 긴요한 법이다. 실상의 상을 보려거든 응당 이 법문을 성실히 닦아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마음이 크게 흔쾌한 때가 있을 것이다. 참나를 직접 보려거든 확철대오가 아니면 안 되고 증득하려거든 미혹을 끊고 진해탈을 증득함이 아니면 안 되며 원만히 증득하려거든 삼혹을 말끔히 다하고 변역생사와 분단생사를 영원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참나의 소재를 논하면 오랜 겁에 윤회하고 지금 이치에 어긋나게 힐문하는 것도 모두 참나의 힘을 받아서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등지고 객진번뇌에 합하여서 그 힘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연야달다의 머리나 옷 속의 보배구슬은 처음부터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망녕되이 두려움이 생겨나고 망녕되이 곤궁을 받아들일 뿐이다.

“제29칙 : 우직함에 만족하여 뒤섞지 말고 마음을 써서 정업(淨業)을 전일하게 닦아라.”

중생의 습기는 각자 치우친 부분이 있으니 어리석은 자는 용렬함에 치우치고 지혜로운 자는 고상함에 치우친다. 만약 어리석은 자가 우직함에 만족하여 뒤섞지 말고 마음을 써서 정업(淨業)을 전일하게 닦으면 이번 생에 반드시 왕생을 획득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우직함’은 지혜로운 자도 따라잡을 수 없다. 만약 지혜로운 자가 그 지혜로 인해 교만하게 굴지 않고 그래도 부처님의 자비원력에 기대어 정토에 태어나길 구하는 법문을 수습한다면 이를 큰 지혜라 한다. 만약 자기 견해만 믿고 정토를 경시하면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도록 악도에 빠져 이번 생의 우직한 범부를 따라잡고 싶어도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

나는 법상과 법성, 선과 교에 깊이 통달한 인사들을 확실히 존경하지만 감히 따르지 못한다. 마치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우물 속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없고 작은 포장지로 큰 물건을 쌀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본받아 이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크게 통달한 분의 행위를 배워서 곧장 자심(自心)을 미묘하게 깨닫고 석존여래의 염불 가르침을 뒤집으려다 크게 통달한 사람도 되지 못하면서 오히려 착실히 염불하여 극락에 왕생하는 우직한 촌부에게 동정이나 받지 않을까 두렵다. 이 어찌 재주를 피우려다 일을 망치고 하늘 높이 올라가려다 구렁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근기를 자세히 관찰할 뿐이다. 

“제30칙 : 불력에 의지하는 정토법문을 닦고 익혀라.”

지금 이 세상에서 설사 정각(正覺)을 이룬 고불께서 다시 나투실지라도 인륜을 돈독히 하고 본분을 다하면서 아울러 정토를 중시하는 법문 이외에 달리 제창하실 법문이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설령 달마대사가 지금 나타나실지라도 사람들에게 불력에 의지하는 정토법문을 닦고 익히라고 가르칠 것이다. 시절인연은 실로 근본이 된다. 시절인연을 거스르면 겨울에 모시옷 입고 여름에 가죽옷 입으며 배고플 때 물 마시고 목마를 때 밥 먹는 것처럼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해를 끼칠 것이다.

“제31칙 : 기웃거리는 마음을 버리고 정토법문을 전수하라.”

선도대사께서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정토법문을 전수함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행인들이 심지가 안정되지 못해 나머지 법문의 스승들에게 이끌려가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만약 초과 이과 삼과 사과의 소승성인 및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보살이나 심지어 일체제불께서 진허공 변법계에 몸을 나투어 광명을 놓으면서 정토를 버리라 권하고 다른 수승한 묘법을 설하실지라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나하나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가장먼저 정토법문을 전수하겠다고 발원하여 자신의 발원을 감히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도화상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이 산이 높아 보이다 저 산이 높아 보이는, 일정한 견해가 없음을 일찍 아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다른 법문을 우러러보며 분별없이 기웃거리는 마음을 다 버리도록 이처럼 말씀하셨다.

“제32칙 : 정토법문의 이익이 훨씬 더 수승함을 깨닫다.”

종전에 대지(大智) 율사란 분이 계셨는데 천태종에 깊이 통달하였고 계율이 청정하였으며 행원이 순수하였고 포부가 광대하였지만 오직 극락정토에 대해 신심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나중에 큰 병에 걸리자 비로소 과거 수행이 옳지 않음을 알았다. 뒤이어 20여 년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정토를 전일하게 연구하여 비로소 정토법문의 이익이 훨씬 더 수승함을 깨달았다. 이에 일체 사람 앞에서 용기를 내어 자성본연에 맞게 발휘하니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제33칙 : 불조의 말씀에서 그 뜻을 취하여 근기에 따라 변통해 말하였다.” 

이익을 잘 얻는 것은 처하여 이익을 얻지 못함이 없다.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이 모두 우리의 본유천진(本有天真)을 가리키지 않음이 없고 선종의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대의이니 하물며 인광의 문초이겠는가? 글이 비록 소박하지만 모두 불조의 말씀에서 그 뜻을 취하여 근기에 따라 변통해 말한 것이니 어찌 나 인광이 지어낸 것이랴? 나 인광이 말씀을 해석하여 전함은 처음 근기가 쉽게 이해하도록 할 뿐이다. 비록 처음 근기를 위할지라도 이렇게 함은 극처까지 수학한 사람일지라도 이 법문을 버리고 다른 법문을 닦지 않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514호 / 2019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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