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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로 수행삼고 칭찬으로 가르친 스승…비구니교육 살아있는 역사

  • 교계
  • 입력 2019.12.06 20:46
  • 수정 2019.12.06 20:47
  • 호수 1515
  • 댓글 0

세수 구순 맞이한 청도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승가대학은 대장간과 같아
잘못한 일 있는 학인이라도
내치지 말고 끝까지 가르쳐야”

1970년 운문사와 첫 인연
외국어 등 외전 강의 선구

“규율·원칙 어렵게 여기지 말고
물 흐르듯 따르면 법다운 삶”

올해 세수 구순을 맞이한 법계명성 스님은 “남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말로 평생 후학들의 모범이 되어온 삶을 대변했다. 
올해 세수 구순을 맞이한 법계명성 스님은 “남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말로 평생 후학들의 모범이 되어온 삶을 대변했다. 

“평범한 스승은 말을 하고, 훌륭한 스승은 설명을 하고, 뛰어난 스승은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감화를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학인들에게 감화를 준 위대한 스승은 아니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 ‘욕교여 선자교(欲敎餘 先自敎)’라 했으니 남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를 먼저 가르쳐야지요. 그래서 나는 평생 용서로서 수행을 삼고, 칭찬으로서 교육의 비결을 삼았습니다.”

구순을 맞이한 대강백의 일성은 흔들림 없이 뚜렷하고 당당하지만 겸손했다. 한 번쯤 크게 웃을 법도 한데, 옷고름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모습은 평생 몸소 보여 온 ‘즉사이진(卽事而眞)’의 가르침 자체다. 비구니교육의 한 길로 가득 채워진 반백년. 매 순간, 모든 일에 변함없이 진실하게 임하는 스승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모범과 감화를 뛰어 넘어 이 세상 어디서나 길잡이가 돼 주는 ‘눈 밝은 별’ 그대로다. 그 별빛 따라 한국불교 2100여명 후학들은 전 세계 비구니승가를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해 왔다.

‘호랑이가 머문다’는 호거산 아래 운문사에는 회주 명성 스님이 있다. 명성 스님은 ‘호랑이 앞에서도 당당하게 펼쳐진, 그래서 연꽃 같은’ 도량 운문사의 오늘을 일군 살아있는 역사다. 동시에 지금도 운문사한문불전대학원장으로 후학을 지도하는 ‘현역 스승’이다. 23세에 출가해 1970년 운문사 도량에서 강석을 편 후 평생 호랑이를 등에 지고 후학을 키워낸 당당하고도 고되었을 삶. 하지만 ‘무엇이 가장 힘드셨는가’를 묻는 질문에 명성 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돌이켜보면 진짜 힘든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학인들과 대중이 함께 살다보면 힘든 일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힘들어도 오래가지 않았구요. 말썽 피우는 학인이 있을 때면 힘들었겠지요. 하지만 누구나 근본을 보면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끝까지 내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 내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대장간입니다. 좋은 쇠든 나쁜 쇠든 거듭 담금질하고 두드려서 좋은 연장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렇게 가르친 비구니스님들이 수행도 잘하고 복지, 불사, 문화 모두 잘하니 보람되지요.”

상좌 세광 스님(우측)과 이야기를 나누는 명성 스님.       
상좌 세광 스님(우측)과 이야기를 나누는 명성 스님.       

1930년 상주서 태어난 명성 스님의 부친은 익히 알려진대로 관응당 지안 대종사다. 출가 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6·25한국전쟁 후인 1952년 23세에 출가했다. 비구니 대선사 본공 스님의 손상좌가 된 명성 스님은 동산 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놓지 않고 정진했다. 본공 스님 또한 손상좌의 법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했지만 앞장서 경전 공부의 길을 열어주었다. 비구니교육의 물꼬를 틀 인재가 절실한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공 스님의 바람에 부응하듯 동학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한 후 명성 스님은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성능 스님으로부터 전강(1958년) 받고 비구니강사가 되었다. 1956년 묘엄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같은 해 태경 스님이 만우 스님에게, 지현 스님이 대은 스님(1899~1989)에게, 그리고 명성 스님이 성능 스님에게서 전강 받으며 1950년대 한국불교계에는 4명의 비구니강사가 탄생, 비구니교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전강 후 동국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서울 청룡사에서 강의하던 명성 스님이 청도 운문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이었다. 영남권 중진 스님들이 운문사 강주였던 묘엄 스님 후임으로 명성 스님을 청했다. 당시 운문사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램프에 불을 밝혀 책을 봐야할 정도로 열악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명성 스님은 “비구니스님들을 가르칠 강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서울을 뒤로하고 청도 운문사로 내려와 80여명의 학인대중을 꾸려 강석을 펼쳤다. 

명성 스님의 서예작품을 설명하는 상좌 은광 스님. 
명성 스님의 서예작품을 설명하는 상좌 은광 스님. 

“1976년 6개월 정도 여행을 하고는 선방을 가고 싶어서 운문사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운문사학인들이 서울로 몰려왔어요. 붙잡혀오듯이 운문사로 다시 내려왔지요. 그 길로 운문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 없었습니다.”
그렇게 운문사로 돌아온 명성 스님은 ‘즉사이진’의 원칙 그대로 운문사를 가꾸고 학인들을 돌보는데 오롯이 진심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 돌이켜 후회가 없다는 것은 그 긴 세월 변함없이 진실했음을 대변한다.

‘빈틈없는 스님’ ‘0.1mm 오차도 허용 않는 스승’이라지만 정작 스님은 그 원칙 속에서 한없이 자유로웠다. 명성 스님이 운문사에 강석을 편 1970년대 ‘비구니절’ 운문사에서는 영어책 읽는 소리가 나고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출가자의 학력이 낮아 초중등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스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명성 스님은 ‘외전’이라는 손가락질에 아랑곳 않고 스님들을 가르쳤다. “출가자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인천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원칙 앞에 스님의 행보는 자유롭고 파격적이었다. 요즘도 다를 바 없다. 새벽 3시로 못 박혀 있던 기상시간을 새벽 4시로 전격 늦췄다. 전기불도 안 들어오는 시절도 아니니 늦게 자는 것에 익숙한 학인들이 한 시간 더 자는 것이 공부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잠 안자고 버티기만 한다고 용맹정진 하는게 아닙니다. 공부도 오래 앉아 있는다고 잘하는 거 아닙니다. 때가 되었을 때, 불꽃이 확 일어날 수 있도록 바짝 당겨주는 게 스승이죠. 모든 물건에는 제자리가 있듯이 그 자리를 잘 찾아가도록 이끌고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시대를 앞서간 교수법으로 승가 교육을 이끈 리더이자 혁신가인 명성 스님의 당부는 무엇일까. 
“법 법(法)자는 물 수변(氵)에 갈 거(去)자입니다. 물이 흘러갈 때 산을 기어코 거스르지도 않고 바위를 기필코 뚫지도 않지요. 흙을 만나면 스며들고, 돌을 만나면 돌아가고, 산을 만나면 아래로 내려가며 오직 바다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멈춤 없이 가는 것이 바로 법이며 법답게 사는 겁니다. 규율과 원칙 지키는 것을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바늘방석 같겠지만 물 흐르듯 따라간다면 솜방석처럼 편안합니다. 뭐 그렇게 어려울 것 없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죽림헌 앞에서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예쁜 인형들이 손님을 먼저 맞이한다.
죽림헌 앞에서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예쁜 인형들이 손님을 먼저 맞이한다.

스님의 거처인 ‘죽림헌’ 앞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오시는 분들 즐거우시라”고 스님이 마련한 환영의 장식이다. 그 인형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선 것을 보며 ‘01.mm 오차 없음’만 떠오른다면 ‘바늘방석’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따듯한 미소를 발견한다면 솜방석보다 더 푸근할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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