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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4대 총무원장 녹원 스님-상

‘비상종단’ 혼란 조기에 수습하고 종단 안정 토대 닦아

1984년 8월 해인사 승려대회서
24대 총무원장 만장일치 선출돼
승려대회 직후 서울 총무원 접수
비상종단 1년도 안 돼 해체 수순

비상종단, 종단개혁안 마련에도
‘개혁조급증’으로 실패로 돌아가
개혁 시행 못하고 끝난 건 아쉬움

녹원 스님(사진 가운데)은 1984년 11월17일 초우 스님(우측)과 기자회견을 열어 비상종단 해체를 선언했다.  ‘사진으로 보는 통합종단 40년사’
녹원 스님(사진 가운데)은 1984년 11월17일 초우 스님(우측)과 기자회견을 열어 비상종단 해체를 선언했다.  ‘사진으로 보는 통합종단 40년사’

녹원 스님이 조계종 제24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것은 1984년 8월1일이었다. 이날 비상종단에 반발한 원로와 중진스님들은 합천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1983년 9월5일 서울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진경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비상종단을 출범시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동아일보(1984년 8월2일자)’에 따르면 이날 승려대회에는 조계종 원로와 중진, 전국사암주지, 선원, 강원 대표 등 1700여명이 참석했다. 승려대회에 170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한 것은 이미 대중들의 마음이 비상종단에서 떠나있음을 시사했다. 

승려대회에서는 종정 성철 스님의 교시에도 불구하고 비상종단이 공포한 종헌개정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 일로 사퇴를 선언한 성철 스님의 사표를 반려했으며, 신흥사 폭력사태로 출범한 비상종단 해체도 결의했다. 새 총무원장으로 원로회의가 추천한 녹원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녹원 스님은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종단을 위해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겠다”며 “늦어도 1개월 내에 종단정상화를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승려대회 측은 전광석화 같이 총무원을 접수했다. 승려대회장 법전 스님은 이날 오후 3시30분 경 서울에 대기하고 있던 감찰총책임 종진 스님에게 전보를 날려 ‘총무원 접수’를 지시했다. 종진 스님은 오후 5시30분경 50여명의 스님들과 진입을 시도, 30여분 만에 총무원을 장악했다. 

당시 총무원 청사에는 비상종단 측 부총무원장 암도, 총무부장 지하, 기획실장 지형(중원) 스님 등이 남아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비상종단 측 대다수 스님들이 승려대회를 막기 위해 해인사로 향한 상태였다. 수적 열세를 확인한 비상종단 측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총무원 청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비상종단 측은 해인사 승려대회가 끝나도록 승려대회 측이 총무원 청사를 접수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지형 스님은 “비상종단은 새로운 종단체제의 종헌을 만들고, 입법기구의 등록을 받는 과정인데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한다고 하니까, 성문 스님더러 ‘현장에 젊은이들이 가서, 일단 승려대회를 막을 수 있으면 막고, 못 막더라도 상황은 파악해야 할 것 아니냐(고 지시했다.)’”며 “(그래서) 1984년 8월1일 총무원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오후엔가 승려대회 쪽에서 총무원을 접수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아무리 군사정부라 하더라도 벌건 대낮에 종로에서, 불법점거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다”고 회고했다.(‘1983년 비상종단 기억과 평가’ 인터뷰.) 

‘경향신문(1984년 8월2일자)에 따르면 비상종단 측은 종로경찰서를 찾아 ‘불법점거’임을 호소하고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사태가 없으면 개입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보였다. 경찰 역시 조계종 종권의 향배가 승려대회 측으로 기울었음을 이미 파악했을 수 있었다. 
 

승려대회 직후 상경 길에 오른 총무원장 녹원 스님은 다음날 새벽 3시경 총무원에 입성했다. 녹원 스님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집행부와 중앙종회를 구성해 종단을 정상화시킨다는 계획을 밝혔다. 승려대회에서 결의된 대로 비상종단 종헌을 무력화시키고, 새 종헌을 만들어 제도개선에 나선다는 방안도 내놓으며 조계종 새 집행부 출범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1983년 9월 승려대회를 통해 탄생됐던 비상종단은 1년여도 안 돼 막을 내렸다. 

조계종 원로를 비롯해 많은 대중들의 신망 속에 출범한 비상종단이 이토록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비상종단이 내놓은 개혁안들은 당시 종단 운영 중심에서 소외된 기존 중진스님들의 반발을 샀고, 이를 조속히 실현하려는 비상종단 구성원들의 조급함은 확고한 지지층이었던 종정 성철 스님과 원로들까지도 등을 돌리게 했다. 결국 고립무원에 놓인 비상종단은 급격히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비상종단은 1983년 7월17일 범어사에서 출범한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젊은 학인과 수좌 등 소장파 스님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비상종단 출범에 앞서 본사주지 임명을 둘러싼 잡음,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빈번한 갈등과 잦은 총무원장 교체 등 1980년대 노출된 조계종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83년 8월6일 신흥사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는 소장파 스님들이 종단개혁에 직접 뛰어드는 기폭제가 됐다. 종단 원로들과 함께 1983년 9월5일 승려대회를 주도하면서 이들은 비상종단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비상종단은 이듬해 1월부터 개혁안들을 성안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안은 그해 7월5일 발표된 종헌개정안에 투영됐다. ‘경향신문(1984년 7월6일자)’에 따르면 종헌개정안은 △기존 본말사 제도를 폐지하고 각 행정단위에 맞춰 각 도 단위에 교무원, 시·군·구 단위에 교구 설치 △입법기구인 교무회의 설치 △종단 최고 종책결정기관인 상임위원회 설치 △전문포교 영역 확충을 위해 스님과 신도 사이의 중간교역자(전법사·전교) 제도 도입 △사찰재산 관리 공영화 △포교원·교육원 설립 △사회봉사활동 기구 강화 등이 골자였다. 

종헌개정안에 담긴 비상종단의 개혁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그렇기에 기존 종단운영 세력들에게 반발을 살 소지가 다분했다. 그렇더라도 비상종단의 개혁안은 그동안 종단의 분규와 갈등에 대한 요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졌다. 본말사 제도 폐지는 종단에 팽배해 있던 문중파벌 의식을 희석시켜보겠다는 의도였고, 상임위원회 도입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기능을 융합함으로써 그동안 종단분규의 원인이 됐던 중앙종회와 총무원의 대립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 교역자 제도는 불교소양을 갖춘 사회 유능한 인재를 포교인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상종단이 발표한 종헌개정안은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 교역자 제도는 비상종단이 해체되는 빌미가 됐다. 

교역자는 불교대학 또는 이에 준하는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상당기간 포교에 종사한 경력이 있거나 10년 이상 승려생활을 경험하고 대교과를 이수한 사람 등에게 자격이 부여됐다. 비상종단은 종헌 9조에서 “조계종은 승려와 전교사(남자는 전법사, 여자는 전교), 신도(청신사, 청신녀)로 규정”하면서 전교사를 승단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했다. 이는 종단운영에 스님과 신도를 이어주는 재가자의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결혼한 스님의 종단참여’를 합법화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 같은 내용이 언론을 통해 전달되면서 ‘정화정신 후퇴’ ‘비구승의 대처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급기야 비상종단에 우호적이었던 종정 성철 스님과 원로스님들까지 종헌개정안 반대로 돌아섰다. 성철 스님은 7월8일 교시를 내려 △신설 교역자를 신도로 명시할 것 △상임위원회 권한 축소 △종단 비상대권설치 개정 등을 요구하며 “(비상종단의) 종헌은 많은 문제점이 있어 종정으로서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비상종단으로서는 이 같은 종정스님의 교시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교역자 제도 도입은 성철 스님이 먼저 제안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비상종단 상임위원회 사무국장 성문 스님은 “(종정스님은) 스님들은 수행에 전념하게 하고, 중간에 교역자를 길러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포교라든지 절집 살림을 맡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한 것이었다”면서 “나중에 그걸 가지고 육부중을 만든다고 몰아붙여버렸다. 그때 그게 되었더라면 한국불교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1983년 비상종단 기억과 평가’ 인터뷰.) 

종정스님의 교시에도 비상종단은 7월14일 종헌개정안을 공포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성철 스님은 이날 종정직 사퇴라는 초강수를 뒀다. 종정스님의 사퇴 선언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종단 내부의 날선 비판이 비상종단으로 향했다. 원로스님들은 대책마련에 나섰고, 교구본사주지들과 그동안 비상종단에서 소외됐던 중진스님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결집했다. 비상종단은 궁지로 내몰렸다. 결국 8월1일 해인사 승려대회로 비상종단은 사실상 해체됐다. 

비상종단의 실패에 대해 “(비상종단을 이끈) 주체세력의 경험미숙 때문”(박부영, ‘전면적 개혁,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 불교평론 50호)이라는 시각이 있고, “개혁의 프로그램 부재에서 비롯된 성급한 개혁작업”(김광식, ‘교단개혁운동의 명암’) “개혁의지의 조급성”(정승석, ‘대한불교조계종 비상종단의 의미와 한계’, 한국불교학 78)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더라도 비상종단이 마련한 많은 개혁안들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총무원에 입성한 녹원 스님은 새 집행부 구성의 기틀을 다졌다. 비상종단 출범으로 기능이 정지된 중앙종회를 재구성하기로 하고, 8월17일 교구본사별로 종회의원 선거를 진행했다. 종단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새 집행부 출범에 반발한 비상종단 전임 집행부들이 발목을 잡았다. 이들은 8월9일 부산 범어사에 별도의 총무원을 세우고 녹원 스님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한발 더 나아가 비상종단 측은 서울 총무원 청사를 침입하는 무리수까지 뒀다. 

‘경향신문(1984년 10월29일자)’에 따르면 비상종단 소속 스님 40여명과 신도 10여명은 10월28일 새벽, 유리창을 깨고 총무원 청사에 진입했다. 이들은 인적이 드문 이날 새벽 시간을 틈타 총무원을 장악했다. 

그러나 종단의 여론은 이미 비상종단에서 멀어져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상종단 스님들은 재가신도 500여명으로부터 9시간 만에 총무원 청사 밖으로 끌려나오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일부스님들이 경찰에 구속되면서 비상종단은 도덕성에도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로부터 2주여일 뒤 총무원장 녹원 스님은 11월17일 비상종단운영회의 의장 초우 스님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비상종단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비상종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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