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한상균 사태 후유증
122. 한상균 사태 후유증
  • 이병두
  • 승인 2019.12.09 15:31
  • 호수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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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사람 받아줄 ‘소도’ 사라졌다

경찰에 쫓기던 민주노총 위원장
2015년 11월 서울 조계사 은신
강경한 정부방침에 경찰과 대치
중재 부담감에 반대 정서 커져
2015년 12월10일 도법 스님과 함께 경찰에 자진 출두하는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2015년 12월10일 도법 스님과 함께 경찰에 자진 출두하는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오랫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아온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이 2015년 11월16일 서울 종로 조계사로 들어왔다. 일단 조계사로 들어온 뒤로는 경찰이 그를 잡으러 섣불리 진입하지 않았다. 실정법 규정에 앞서 먼 옛날 소도(蘇塗)에 대해 권력이 그러했듯, 종교시설에 대해 암묵적으로 ‘특별한 기능’을 인정해온 관례에 따르는 것이다. 

과거 불교계는 내부 진통이 너무 오래 계속된 관계로 독재정권 시절에 이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정권에 밉보이면 종권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현대불교사가 안겨준 본능적 반응이 있었고, 1980년 ‘10‧27법난’의 후유증이 너무 커 ‘자칫하다 또 그런 일을 당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봄의 이른바 ‘조계종 개혁불사’ 이후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KT노조를 비롯하여 공권력에 쫓기는 이들이 조계사에 찾아와 피난처를 구하면 이들을 보살피며 노조원과 정부(또는 사용자) 사이의 대화를 주선하여 해결하였지만, 때로는 경찰이 경내로 들어와 노조원들을 강제 연행하면서 불교계와 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한 적도 있었다.

어느 때인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 ‘쫓기는 사람들’을 받아주는 소도 기능을 상실하고, 명동성당도 그 뒤를 잇게 되면서 조계사가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경찰의 수배를 받던 철도(KORAIL)노조원들이 2013년 12월23일에 조계사를 찾았고 정부는 ‘엄정한 법집행’만을 내세우며 경찰병력을 진입시키겠다고 하였지만, 다행히 화쟁위원회 중재로 KORAIL 사장과 노조원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물리적 충돌 없이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2015년 겨울 한상균 사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사태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정권 내부에서는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강경론이 우세하였고, 노조 쪽도 비슷한 기류였다. 조계사 주변에서는 긴장감이 높아졌고,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할 조계종의 입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난처해져만 갔다. 결국 12월9일 수백명의 병력으로 조계사 주변을 에워싼 경찰이 “병력을 진입하여 체포하겠다”고 발표한 뒤 총무원장이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는 기자회견을 하는 등 긴박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결국 하루 뒤인 12월10일 오전 10시 반경 한상균이 24일 동안 머물렀던 조계사 관음전 밖으로 나와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과 함께 대웅전에서 절을 올리고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약 15분간 면담을 가진 뒤 이 사진에서 보듯이 경찰에 자진 출두하는 형식으로 사태는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조계종, 특히 중재역할을 자임했던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등 이 사태의 후유증이 컸다. 무엇보다도 큰 후유증은 이 사태 뒤로 ‘중재역할을 맡아줄 곳’과 ‘쫓기는 사람들을 받아줄 소도’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에 이어 조계사 신도들과 총무원까지도 “짐이 너무 무겁고 벅차다”는 정서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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