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노다 규호의 ‘잇큐선사(一休禪師)’
46. 노다 규호의 ‘잇큐선사(一休禪師)’
  • 김영욱
  • 승인 2019.12.11 10:48
  • 호수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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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고 타락한 불교계를 꾸짖다

잇큐 선사가 임종 전 남긴 시
14C 파격적 행보 보인 선승
시를 통해 불교계 쇄신 촉구
노다 규호 作 ‘잇큐 선사’, 비단에 채색, 165.0×220.0㎝, 1937년, 국립중앙박물관.
노다 규호 作 ‘잇큐 선사’, 비단에 채색, 165.0×220.0㎝, 1937년, 국립중앙박물관.

十年花下理芳盟(십년화하리방맹)
一段風流無限情(일단풍류무한정)
惜別枕豆兒女膝(석별침두아여슬)
夜深雲雨約三生(야심운우약삼생)

‘십 년 동안 꽃 아래서 아름다운 약속 잘 지켰으니 한 가닥 풍류는 무한한 정이로다. 그녀 무릎에 머리 베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깊은 밤 운우 속 삼생을 기약하네.’ 잇큐 소준(一休宗純, 1394~1481)의 ‘난세시(亂世詩)’.

난세시를 아는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석별의 정이 담겨 있다. 이 시는 흥미롭게도 임종을 앞둔 한 선승이 남긴 시이다. 종교적인 감정과 육감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를 지은 선승의 이름은 잇큐 소준. 그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선승이자, 자유로운 구도자였다.

14세기 일본, 약 60년간 남북으로 분열된 남북조 시대가 종결을 맞이하였다.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이 황위에 오르고 2년 후, 1394년 1월에 잇큐 소준은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곳은 궁이 아니었다. 일찍이 남조 출신인 어머니 후지와라씨(藤原氏)가 모함을 받아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천황의 아들이었지만, 훗날 분열을 염려한 천황 가문에 의해 6살의 나이로 한 사찰로 출가하게 되었다.

1415년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선사인 카소 소돈(華曳宗曇, 1352~1428)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법을 이었다. 몇 년 뒤, 수행 중에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 깨달음을 얻은 잇큐는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는 당시 혀끝으로 화두를 말하며 진리를 속이며 매일 권력 있는 정치인에게 굽신거리는 타락한 불교계를 보며 비판하는 시를 짓는 등 불교계의 쇄신과 선종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잇큐 선사는 여러 기행으로 유명했다. 그는 늘 목검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루는 한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이 목검은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하물며 사람을 살릴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선종을 목검에 비유한 것으로, 목검으로 사람을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것처럼 근래의 선종이 허식과 위선에 빠진 것을 비판한 것이다. 또 긴 경책을 들고 수행자들을 깨우치고 다녔고, 혹은 지팡이 끝에 해골을 매달아서 사람들에게 인생무상을 경계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노년에 맹인 여인 삼녀(森女)와 만나 사랑에 대한 정서를 찬미하고, 종교적인 감정을 여인과의 육감적인 사랑에 빗대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잇큐 선사는 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인물화에서 자주 등장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30년대 일본 화단에서 명성을 떨쳤던 화가 노다 규호(野田九浦, 1879~1971)가 1937년에 작업한 ‘잇큐 선사’는 경책이나 목검으로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불교계를 꾸짖고 비판했던 선사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삶 속에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잇큐 선사의 형적(形跡), ‘선즉풍류(禪卽風流) 풍류즉선(風流卽禪)’. 그에게 있어 선은 곧 풍류였고, 풍류 역시 그에게 하나의 선이었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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