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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고 시비하는 마음 버리는 것이 보리심의 시작입니다”

울산 백양사 주지 산옹 스님

화엄경 십주품은 나를 찾는 공부
십주는 공성에 머무른다는 의미
형상에 묶여 공성에 머물지 못해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보살
​​​​​​​
발심 위해서는 거짓없는 생각과
흔들리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며
일체중생을 위한 대비심 있어야
그럴 때 비로소 보리심 성취돼

산옹 스님은 “화엄경은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아가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통도사 제공
산옹 스님은 “화엄경은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아가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통도사 제공

오늘 법회에 오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부산 국제시장에 갔을 때 콩나물 파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30년 후에도 그분은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콩나물을 팔고 계셨습니다. 30년 동안 그분이 들고 다녔던 그 콩나물 바구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담겨 있을까. 저기에는 아들을 낳고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키웠던 그분의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애환이 모두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저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일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남편이 되고, 부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그 과정들을 겪으며 오늘 이 자리까지 왔을 것입니다. 

‘화엄경’에는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서까래가 중요한가, 기둥이 중요한가, 대들보가 중요한가, 이런 질문을 드리곤 합니다. 

여러분은 보통 대들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서까래가 없으면 집이 될 수 없고, 기둥이 없어도, 도리가 없어도 집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모여서 하나의 집을 형성합니다. 이 공간도 밖에서 보면 설법전 하나인데 안에 와서 보면 수많은 대중이 모여 있습니다. 하나 가운데 많은 것이고, 많은 가운데 하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이라는 ‘법성게’의 구절이 있지요? 모두 ‘화엄경’ 이야기입니다. 이 법문도 어쩌면 저 끝에 있는 서까래도 안 되는, 부연에 관한 이야기나 다름이 없겠습니다. 

‘화엄경’이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중에서 한 글자만 끄집어내어도 줄줄 이어지는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다시 말해 파도가 한번 출렁하면 일파자동만파수(一波自動萬波隨), 만개의 파도가 이어져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화엄경’ 중에서도 ‘십주품’이 되겠습니다. 앞서 십신에 대해 공부하셨을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자리가 확고해지셨습니까? 어제까지는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내용의 법문이었다면, 십주품은 내가 어디에 있을까를 자문하는 시간으로 여기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수없이 열거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오고 갑니다. 저도 통도사 부주지로 통도사에 있는 줄 알았는데 또 한 달 전 울산 백양사 주지를 맡아 백양사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또 화엄산림 법사로 다시 통도사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주처(住處)는 어디일까요? 내가 머무르는 곳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머무르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하니까 주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주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주처가 있습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집으로 간다고들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집이 이사하면 장소가 또 바뀝니다. 끝없는 이사 인생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십주라는 것은 공성에 머무른다는 의미입니다. 텅 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우리는 어떠한 형상에 묶여서 공성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경전이 저 높은 세계의 이야기라고만 단정합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화엄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가 보이시죠? 여러분의 눈동자에 제가 있는 대로 다 찍혀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찍혀 버린 것입니다. 더 들을 이야기도, 볼 것도 없습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딱 찍히면 다 되는 것입니다. 

십주품은 보살계위로 말한다면 ‘화엄경’ 52계위 중 11위에서 20위까지를 말합니다. 십신을 지나서 마음의 근본자리에 머무르는 지위인데 보살이 머물러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 품에 담겨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의 주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처가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 십주품입니다. 또는 ‘금강경’에 통달무아법자여래설명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如來說名眞是菩薩)이라, 내가 없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가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입니다. 

보아도 보았다는 생각을, 들어도 들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눈동자가 없다면 무엇으로 이 세상을 보고, 분별하겠습니까. 좋다, 나쁘다, 기다, 아니다, 예쁘다, 아니다, 잘났다, 못났다, 할머니다, 아들이다, 무엇으로 구분하겠는가 말입니다. 눈동자가 없는데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귀로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옳고 그르다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오늘 ‘화엄경’ 십주품을 듣는 자리, 십주보살이 설하는 이 자리는 눈으로 분별하는 자리가 아니고 귀로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분별과 시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다 내려놓고 저 가슴 속 깊이 있는 마음에서 보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통도사에 오셨으니 문수보살의 법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첫째 인연이 선지식이라고 합니다. 왜 선지식이 필요한가 하면 마음속의 수승한 생각이 감춰져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 밖으로 끄집어내 주어야 합니다. 선지식이 아니면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발하는데 첫 인연이 바로 선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발심을 하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첫 번째는 직심(直心)입니다. 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곧은 마음은 깨끗함과 더러움이 붙지 않는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직심이라고 표현하는가, 정념(正念)은 진여법고(眞如法故)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생각, 직심은 진여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진여는 진여성품이라고 말합니다. 밖으로 거짓이 없고 안으로 어지러움이 없어야 진여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러한 진여를 다 갖고 계시지요? 밖으로 어지럽지 않고 거짓도 없고 속으로 어지럽지 않은 그런 깔끔한 마음을 갖고 계시지요? 그것이 있어야 발심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심심(深心), 깊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재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아까 콩나물 파는 분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 분의 깊은 마음, 콩나물 단지를 끌어안고 30년을 살면서 아이들을 키워온 그 깊은 마음, 여러분들도 그런 깊은 마음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은 깊은 마음으로 일체 선행을 닦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일은 다 하겠다고 하는 원력입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묻는 행위도 선행이며 보살행입니다. 그 길이 보살도입니다. 단 내가 어떤 선행을 하더라도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일체중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화엄경’은 저 멀리 담 넘어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것인가,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싶은가, 착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늘 스스로 점검하고 실천하도록 이끌어주는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는 대비심이 있어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구호하겠다, 보호하겠다, 그런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해서 보호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어머니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그 어머니 마음을 다 갖고 계십니다. 모두 훌륭한 어머니이십니다. 

얼마 전, 수능시험 치기 전날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어느 보살님이 와서 막 운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왜 우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울어서 물어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겨우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아이는 시험을 치러 갔는데 자신이 해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너무 해준 것이 없어서 울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로서 이미 훌륭하십니다. 아이를 낳아서 오늘까지 길러서 시험 치러 갈 정도까지 길러주고 보살펴 주었으면 어머니 일은 다 하신 겁니다. 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하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립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시지요?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음전에 가서 관세음보살님을 찾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관세음보살이라 믿으십시오. 오늘처럼 ‘화엄경’을 들을 때도, 내가 화엄법회 대중이구나,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 가운데 한 자만 알아도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보리심을 성취하기 위해 직심과 심심과 대비심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2월9일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현문 스님)에서 봉행된 제49회 화엄산림 대법회에서 울산 백양사 주지 산옹 스님이 ‘십주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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