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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 시선으로 전한 사람과 내밀한 풍경

  • 불서
  • 입력 2019.12.23 11:17
  • 수정 2019.12.23 11:18
  • 호수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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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달을 병에 담은 동자승’ / 장산 스님 지음 / 조계종출판사

‘허공의 달을 병에 담은 동자승’
‘허공의 달을 병에 담은 동자승’

“가만히 보니 사람들의 눈동자엔 수많은 연꽃들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연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 속에 담아가려는 것 같았지요. 서 대사에게 연꽃을 얼마나 찍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연꽃을 찍는 것이 아니라 연꽃 속의 미소를 본다는 것이었지요. 염화미소? 부처님이 영산에서 연꽃을 드시니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는 그 염화미소가 생각났습니다. - ‘궁남지에 연꽃이 필 무렵’”

지난 2013년 부산에서 설악산까지 53일간 왕복 1300㎞를 걷고, 그 이야기를 수필집 ‘걷는 곳마다 마음 꽃이 피었네’로 펴냈던 장산 스님(부산 세존사 회주)이 그간 수행 길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들을 통해 생긴 알음알이의 내밀한 이야기 52편을 모아 ‘허공의 달을 병에 담은 동자승’으로 엮었다.

책은 저자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마주한 풍경들로 가득하다. 불현 듯 도반의 연락을 받고서, 또는 계절이 바뀌거나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떠난 길 위에서 눈부신 정경과 인상적인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들이다.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 속 정취를 보러 찾아간 봉평에서 허생원과 동이가 걸었을 메밀꽃밭에서 강렬한 달빛에 취하고, 가야산 해인사 길목에선 천 년 전 최치원이 ‘천상이 어딘가 했는데 바로 예로구나’라며 감탄했던 홍류동 계곡을 물들이고 있는 붉디붉은 진달래를 보며 봄의 향연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즐거워 비명을 지르듯 흐드러지게 핀 부여 궁남지 연꽃밭의 정경은 물론, “정상에 올라보니 해가 어느새 떠올라 바다는 은빛 물결이 출렁이었습니다. 멀리 점점이 보이는 섬들과 섬들 사이로 작은 통통배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선경이었습니다. 바다엔 자욱이 실안개가 섬과 섬 사이를 아득하게 이어 신비하기까지 하였지요”라며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의 아름다움을 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전하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 역시 흥미롭다. 남원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이몽룡을 즉석 연기하는 유쾌한 청춘남녀, 울산 진하 해변을 덮친 해무를 보며 처용가를 읊는 교포 3세 고대 언어학자 헤일리 킴, 해인사에 살던 기인 앵금이 등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을 간직한 이들의 각양각색 모습을 전한다.

장산 스님이 50여 년 출가 생활 중 만난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담아 수필집으로 엮었다.
장산 스님이 50여 년 출가 생활 중 만난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담아 수필집으로 엮었다.

그런가 하면 술 냄새 풍기며 ‘시님은 죄 안 짓고 사십니꺼?’ 라고 묻고는 ‘중생들 지옥에 많을 겝니다. 중생 구제하시러 지옥으로 가세요’라고 선사의 할처럼 한마디 이르는 사람, 기차 안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이와 이를 말리던 조폭과 절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인연 등 사람 이야기에서는 수행자의 면목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진묵대사가 유생을 출가시킨 이야기, ‘육신은 바람이요 마음은 하늘이라 칼로 내 목을 친다 해도 허공을 베는 것’이라며 황제의 청을 거절했던 지공 스님 이야기 등 옛 스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 되새겨야 할 지혜와 교훈을 전해주기도 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지은경 박사가 “자연 합일 사상의 덕목을 갖춘 스님의 글들은 고통이 없다. 세상사와 인간사를 관통하는 수행자로서 양심, 도덕, 인간미가 녹아 있는 글 속에는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는 미적 가치가 구현되고 있다”고 평한 스님의 수필은 인간사를 변화시키고, 만상의 참모습을 밝혀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은 수행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얻은 알음알이를 각 글의 말미에 짧은 시구절로 옮겨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더불어 직접 연필로 그린 초상화와 펜으로 그려낸 세밀화들이 풍미를 더해준다. 이렇게 50여년 출가 발자취를 담은 수필집에서 삶의 쉼표를 찍고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만날 수 있다. 1만5800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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