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해 특집] 황정산 미륵대흥사 회주 월탄 스님

  • 새해특집
  • 입력 2020.01.02 11:30
  • 수정 2020.01.10 09:28
  • 호수 1519
  • 댓글 0

무아·연기로 ‘차별의 벽’ 부수면 이 땅은 자비심 출렁이는 용화세계

고시공부 위해 화엄사행
금오 스님 ‘일체유심조’
법문 한 마디에 출가단행

지리산 반야봉 상무주암서
‘이뭣고’ 삼매 3일 지속 후
해인사 강원에서 교학 매진

의천 스님 시 한편에 감동
대법원장실 찾아가 할복
‘정화불사’ 정당성 천명

세납 60년 넘기고도
폐사지에서 정진하며
천년고찰 면모 되찾아

세계 각국에 만연된
반목·갈등·착취·전쟁
십선행 실천으로 해결

주석처를 ‘정화당(淨化堂)’으로 명명한 이유에 대해 월탄 스님은 “나를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황정산 미륵대흥사 일주문 두 기둥에 걸린 주련이 묵직하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한 뿌리요. 만물 또한 나와 한 몸뚱이라(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문하 가운데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손꼽혔던 사철(四哲)의 한 사람이자, ‘조론(肇論)’의 저자인 승조(僧肇 384~414)가 남긴 일갈이다. 일주문 뒤편의 두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 있는데 승조의 일구는 아니다.

‘동체대비를 실천하면 사바세계는 용화세계로 변하리라(行心同體大悲 娑婆変化龍華).’ 이 산사가 용화정토를 꿈꾸는 도량임을 극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자장율사가 통도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 미륵대흥사는 한 때 1000여명의 스님들이 머무는 대찰로 알려졌으나 크고 작은 전란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황량한 폐사지에 컨테이너 박스 2개 들여놓고(2001) 정진하며 대작불사를 일으킨 장본인은 이 절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월탄 스님이다. 대웅전, 금성선원(金聖禪院), 정화당(淨化堂), 정광당(淨光堂), 미륵불 등을 조성하며 옛 사격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고, 부속 암자로는 나옹(懶翁) 선사가 문을 연 원통암과 청련암이 남아 있다.

‘이렇게 살아봐야 도·군서기(書記) 자리 하나도 얻기 어렵다. 대장부로 태어났으니 크게 놀자!’

1956년 초여름, 대학 1학년을 다니던 청년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다녀갔던 화엄사로 향했다. 뒷방 하나 얻어 법전(法典)을 펼쳤으나 시야에 들어 온 건 민·형사법이 아니라 지객을 맡고 있던 월국 스님의 위의였다. 걸음걸이, 손 움직임, 말씨 하나까지도 격조 있으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신선처럼 다가왔다. 하안거 해제날 월국 스님이 법당에 올라가 금오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라 했다.

“이 세상 놈들은 다 산송장이야! 자기를 만드는 게 마음인데 그것을 모르고 이 몸뚱이만 자기라고 알고 살거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야! 마음이 우주의 섭리를 주재하는 거야!”

태어나 처음 들은 ‘산송장’ ‘일체유심조’가 청년의 온 몸을 흔들어 놓았다. 청년은 ‘월탄(月誕)’이라는 법명을 받으며 당대 선지식이자 ‘호랑이스님’으로 불렸던 ‘금 까마귀’ 금오(金烏)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지리산 금정암(金井庵)에서 금오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금오 스님이 화두를 내렸다.

‘나에게 한 물건 있다(吾有一物).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無頭無尾 無名無字).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며, 밝기는 대낮 같고 어둡기는 칠흑보다 더하다(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얻고자 하지만 얻지 못한다(常在動用中 收不得者). 이것은 무엇인가(是甚麽)?’

금오 태전·성림 월산 스님의 법호를 딴 금성선원.

2년 동안 금오 스님을 시봉하며 정진했으나 스스로 생각해도 큰 진척은 없어 보였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돈에게 부탁해 얻은 쌀 세 가마를 일주일 걸려 부려놓으며 다짐했다.

“이 쌀을 다 먹기 전까지 내 마음을 찾스님지 못한다면 여기서 죽으리라!”

수행하려면 마장이 생기는 법. 3·7일 기도부터 올린 후 ‘이뭣고’ 화두를 들었다. 지리산 반야봉 아래 자리한 상무주암은 고요해 정진하기에 그만이었다. 그런데 개구리가 말썽이었다. 봄볕에 녹은 물줄기가 암자 곁으로 흘렀는데 개구리들이 엄청 울어대는 것이었다. 울음소리 진원지 주변을 작대기로 몇 번 치면 가라앉았는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또 울어댔다. 다시 작대기를 들고 나가 달래놓고 돌아 왔으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세 번째 작대기를 들었다. 순간 한 생각이 스쳐갔다.

“이럴게 아니다. ‘이뭣고’에 더 집중하면 개구리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작대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와 좌복을 펼쳤다. 개구리 울음소리는 지리산 정봉 기슭에 가득 찼으나 수좌의 귓가에는 미치지 못했다.

“모든 건 마음이 짓는 것이구나!”

한 달도 안 돼 암자에 있던 쌀을 지고 내려 와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법문을 했다.

“이런 산동네에서 목기 만들며 사는 건 공덕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10분만 내 법문 들어보라”며 지리산 아랫마을 곳곳을 누볐다. 때로는 높은 곳도 올라야 했는데 다리가 아파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데 다리가 왜 아프지?”

개구리 소리 안 들린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했다. 상무주암으로 올라와 다시 좌복을 펴고 ‘이뭣고’ 화두를 챙겼다. 낮밤이 한 찰나 속에 지나가듯 삼매는 3일 동안 여여하게 지속됐다. 선교를 겸수했던 옛 선지식이 그러했듯, 산을 내려와 해인사 강원으로 발길을 돌렸고 그곳에서 부처님 말씀을 새겨갔다.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능엄경’까지 청강하며 교학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는데 해인사 총무를 보고 있던 영암 스님이 “서울에 난리가 났으니 다녀오라” 일렀다. 전통불교 회복을 기치로 펼쳐왔던 정화운동(1954∼1962)이 대법원 재판(1960년 11월24일)에 의해 무산될 위기에 직면하자 수좌들이 조계사에서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던 때였다. 급기야 재판에 앞서 조계사 승려대회(11월17·19일)가 개최되었는데 해인사 대표로 올라 온 월탄 스님도 이 법석에 자리했다. 원담(전 덕숭총림 방장) 스님이 사부대중을 향해 시 한 수를 전했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 스님이 이차돈의 묘 앞에서 읊은 시였다.

‘남쪽 천리 길을 걸어와 성사께 문안드립니다(千里萬來問舍人)./ 청산은 적적한데 세월 몇 해나 지났습니까(靑山寂寂幾經春)?/ 말세에 난법을 만나면(若逢末世難行法)/ 저 또한 성사를 따라 신명을 아끼지 않겠나이다(我亦如君不惜身).’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월탄 스님을 포함한 6명의 비구들은 대법원장실에 들어가 할복(割腹)으로 정화불사의 대의를 천명했다.

“우리는 비구승입니다. 어떻게 세상 법으로 부처님 법을 재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로 인해 여론은 크게 바뀌었고 대법원은 정화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월탄 스님이 지금까지도 ‘정화 6비구’로 회자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금성선원(金聖禪院)은 2013년 개원했다. 매년 20여명 내외의 수좌들이 방부를 들인다. 미륵도량에 선원을 연 이유를 여쭈었다.

“2000여명의 수좌 중에 눈 밝은 선지식이 한 사람이라도 더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금성(金聖)’은 금오 태전(金烏 太田) 스님과 성림 월산(聖林 月山) 스님의 법호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불국사 조실로 주석했던 월산 스님은 금오 스님의 제자로서 월탄 스님에게는 사형(師兄)이다. 선원의 편액을 통해 사형의 위엄을 기억하려는 것인데 그 연유가 궁금했다.

“은사이신 금오 큰스님을 5년 동안 시봉하면서도 인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승사 하안거를 보낼 때입니다. 사형이신 월산 스님께서 오셔서는 ‘소견 있으면 말해보라’ 하셨습니다.”

월탄 스님이 조성한 미륵대흥사 전경.

월탄 스님이 내어 보였다.

‘마음과 몸은 본래 공이니, 공이라 한 그 공 또한 공이다. 이 때 어떠한 물건인고? (일원상을 그리며)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로다(心色本來空 空空亦復空 此時是何物 ○天天地地).’

이에 월탄 스님은 전법게를 내렸다.(1997년 음력 7월15일)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없다고 하는 그것도 없다. 미룡의 큰 가풍,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本來無一物 無一物亦無 彌龍大家風 常住而不滅).’

미륵과 용화세계를 상징하는 ‘미룡(彌龍)’은 월탄 스님의 법호이기도 하다. 수좌의 삶을 살아 온 선승이 미륵의 뜻을 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미륵부처님과의 인연이 범상치 않다. 진표율사가 백제 땅에 세운 세 개의 미륵도량(금산사·법주사·발연사) 중 하나인 법주사 주지를 맡을 때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했지 않은가!

“미륵사상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도솔천에서 법을 설하며 천자(天子)들을 제도하던 미륵부처님이 56억만년이 지나면 사람이 사는 땅에 내려온다는 ‘미륵하생’과 인간세계에서 선업을 쌓아 도솔천에 태어 나 미륵부처님의 설법을 듣겠다는 ‘미륵상생’입니다. 전자에는 희망에 찬 기다림이, 후자에는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언뜻 상반돼 보이지만 맥은 같습니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명시된 미륵부처님 출현 직전의 인간 세상에 주목해 보면 두 경에 담긴 공통된 결을 읽어낼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오염이 소멸되고 과수(果樹)가 풍요로운 땅입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까지도 사라진 세상입니다. 균등하여 서로 만나면 기쁘고, 좋은 말만 하고 사는 사회입니다. 무차별이 빚어낸 정토세계입니다.”

오탁악세가 아닌, 도솔천과 유사한 정토가 구현됐을 때 미륵부처님이 내려오신다는 뜻이다. 그 정토를 일구는 건 미륵부처님이 아닌 인간이다. 원력을 세우지 않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세계요, 의지가 결여되면 결코 조성할 수 없는 세계이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한 뿌리요. 만물 또한 나와 한 몸뚱이’이라는 승조 스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통찰한 일언입니다. 이 뜻을 새긴 가슴에서 대자대비심이 솟아납니다. 그 자비심이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의 벽을 허물고, 반목과 갈등, 전쟁과 착취를 걷어 냅니다. 자비심이 출렁이는 순간 이 사바세계는 용화세계로 바뀝니다.”

출처를 알 수 없었던 일주문 주련은 월탄 스님의 작품이었다. 승조 스님과의 법담이자, 60여년 동안의 정진을 통해 가름한 월탄 스님의 전언이기도 하다. 용화정토를 향한 일상에서의 실천 덕목을 여쭈었더니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나오는 십선도를 꺼내 보였다.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십선행(十善行)·십선도(十善道)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하라(思)는 건 실천하라는 겁니다.”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르침 하나를 부탁 드렸다. 상무주암, 수도암, 무명암, 상원사 등에서만도 30안거 이상을 성만한 월탄 스님 아닌가.

‘백척간두 끝에 앉은 사람이/ 비록 진리를 얻었다고 하나 참은 아니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야/ 시방세계와 내가 둘 아닌 본래 부처로 돌아간다(百尺竿頭座低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是全身).’

경허 스님으로부터 시작해 만공-보월-금오-월산 스님의 선법을 잇는 선사임을 다시 한 번 알겠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주석처를 ‘정화당(淨化堂)’으로 명명한 이유를 여쭈었다.

“나를 정화하는 중입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월탄 스님은
1937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원반교리 332번지에서 태어났다. 1956년(승적상은 1955년) 금오 스님을 은사로 화엄사에서 출가한 후 1960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8년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4~6, 8~10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으며 8대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했다. 조계사·전등사·법주사 주지와 동국대 승가총동문회장, 불교발전연구원 이사장,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상무주암, 수도암, 무명암, 상원사 등에서 30안거 이상을 성만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단양 미륵대흥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1519호 / 2020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