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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2. 설립조사와 역대 이사장

  • 특별기획
  • 입력 2020.01.02 12:48
  • 수정 2020.01.08 09:24
  • 호수 1519
  • 댓글 2

만공·성월·남전·도봉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 선학원 설립주역

13대 이사장 범행 스님, 정관 개정으로 조계종과 결별 수순 ‘논란’
금정사 혜명·보각선원장 송산 스님 등 ‘종교성 잃은 재단법인’ 비판

1930년대 적음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건당입실한 당시 사진. 용성 스님의 모습도 확인된다.

선학원을 설립하고 일궈 온 선지식들의 발자취는 곧 한국불교 전통과 청정불교를 지켜 선맥을 계승하고자 했던 당시 불교계의 원력을 대변한다. 일제강점기 혼란 속 왜색불교에 맞섰고, 해방 이후 만연한 식육대처의 풍토 속에서 불교를 바로 세우려는 숭고한 뜻이 그 발자취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학원의 과거는 현재 조계종으로 계승되는 한국불교의 원대한 흐름과 맥을 함께한다. 선학원 설립조사와 역대 이사장 상당수가 현재 조계종 주요사찰을 대표하는 스님들이었으며, 혼란의 시기 선학원을 중심으로 그 원력을 모아왔기 때문이다. 선학원 설립조사와 역대 이사장 변천사를 통해 그 역사를 짚어본다. 편집자

 

선학원을 태동시킨 주역이 만공(수덕사), 도봉(석왕사), 남전(범어사), 석두(범어사), 용성(범어사·해인사), 성월(범어사) 스님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921년 8월 ‘조선불교 선학원본부’ 건립을 주도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스님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만공 스님은 선학원 창건을 최일선에서 이끈 주역으로 평가된다. 선학원의 설립취지를 역설하며 건립자금을 모았고 선우공제회 출범 직후 중앙 수도부 이사를 담당했다. 또 어려운 재정상황을 타개하고자 정혜사 토지 2만400㎡(6173평)을 기부하는 등 물심양면 선학원의 설립 취지를 현실화하는 데 매진했다. 또 선학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등록한 1934년, 제1대 이사장을 역임한 이후 1946년 입적까지 선학원 중앙선원의 조실로 머물며 정신적 지주로서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재단법인으로 어렵게 출범한 선학원의 2대 이사장은 만공 스님과 함께 선학원 태동에 기여한 성월 스님이다. 1922년 선학원이 처음 탄생할 당시 관할하던 범어사 경성포교당을 해체해 선학원 건립에 투입했으며 선학원 초대 평의원이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대리를 거쳐, 재단법인 등록시 초대이사를 역임하는 등 운영에 깊이 개입했다.

성월 스님은 범어사를 오늘날 선찰대본산으로 일컬어지게 한 주역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 범어사 내 안양암과 내원암, 계명암, 원효암, 대성암, 원응정사 등 7개 선원을 개설하고 무차선대회를 여는 등 선맥 계승을 위한 성월 스님의 원력은 지역 대표사찰을 넘어 전국 수좌들을 위한 발걸음에 다름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 재정적 어려움으로 와해 위기에 처한 선학원을 재건한 이는 이후 제3대 이사장(1942~1946)을 역임한 적음 스님이다. 적음 스님은 직지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한의학에 능했으며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 만공 스님에게 건당입실하면서 재정적 토대를 활용해 본격적으로 선학원을 인수,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적음 스님의 건당과 선학원 인수의 선후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30~1931년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연관성을 확인하기엔 충분하다. 특히 적음 스님은 만공 스님이 초대이사장직을 맡은 당시 상무이사로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3대 이사장을 역임한 뒤 1950년부터 10년간 5대 이사장으로 선학원을 이끌었다.

선학원 설립조사와 관련, 유일하게 이견이 존재하는 이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다. 근래 재단법인 선학원이 역사적으로 명확히 인정된 만공, 남전, 도봉, 성월, 용성 스님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용운 스님을 조명하기 위한 노력을 활발하게 전개하는데 따른 불편한 시각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 김광식 동국대 교수는 “용운 스님은 선학원 창건 당시 감옥에 수감돼 있었기에 설립에 참여할 수 없었다”며 “이후 선학원에 머무르며 활동하긴 했지만, 이는 당시 선학원의 선풍진작을 위한 노선에 ‘합류’하는 형태이지 그 주체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분석한다.

재단법인 선학원 설립 초기 이사장과 임원들이 조계종의 조실급 스님들로 구성된 설립조사의 성격을 가진다면, 1950년대 이후 경봉, 석주, 청담, 향곡, 진제, 정일 스님 등 역대 이사장들은 그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은 상좌그룹이자 이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총무원장, 종정급들이 상당수다. 1950년대 이후 선학원이 불교정화운동의 산실로서, 비구·대처간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한국불교계 역사를 관통해 현재의 비구종단 조계종으로 안착되기까지 확고한 구심점으로 역할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불교계를 대표했던 선지식들이 선학원을 설립한 당시부터 올곧게 추진해 온 청정승가를 향한 원력이었으며, 1941년 유교법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불교정화의 한 흐름으로 비구승, 수행승 중심으로 재정립된 현 조계종의 이념과 토대가 됐다.

조계종과 한 몸처럼 여겨졌던 선학원은 1970년대 들어 조계종과 거리두기에 나선다. 이전에도 범어사 명의차용으로 인한 재산환수 소송 및 조계종 종단개혁 당시 투입된 재단 재산 환수 요구 등 일부 갈등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결별 수순을 밟은 것은 제13대 이사장 범행 스님(1975~1991) 때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범행 스님이 1978년 정관 변경을 통해 선학원 설립 당시 임원 스님에 대한 기록과 조계종 관련 규정을 삭제한데 따른 것이다. 이른 바 ‘선학원 재단 정관변경 사건’으로, 1974년 5월 불거진 불국사 주지 사태가 요인의 하나로 거론된다.

당시 불국사 주지였던 범행 스님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연대에 기반해 폐허에 가깝던 불국사를 재건하는 등 대외적인 성과를 보였지만, 총무원이 ‘종단의 부족한 예산 충당’을 이유로 불국사 직영전환 방침을 정하고 5월24일 신임주지로 감찰부장 진경 스님을 임명했다. 이에 범행 스님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인수인계를 거부한 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분쟁이 심화됐고, 1975년 선학원 이사장이 된 범행 스님이 조계종과의 관계성을 약화시킨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광복 후 청정불교를 주창했던 조계종 지도자 다수가 선학원에 머물렀고, 1970년대 초반까지도 선학원의 주요임원 및 분원장 임명은 조계종의 허가를 전제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범행 스님의 이런 행보에 대해 당시 선학원 내부에서도 반발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정사 주지 혜명 스님은 ‘선학원은 조계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해 배포했다. 스님은 해당 문건에서 “한 종교단체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종지와 이념과 교리가 있어야 하나, 현재 선학원은 아무런 종교적 이념도 불교적 종파도 찾아볼 수 없다”며 “재단법인체로서 재물을 경영하기 위한 사업기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스님은 “선학원이 조계종 재단임에도 별도의 종(宗)을 만든다는 것은 전체 분원장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범행 스님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한불교조계종선학원의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선학원 안팎에서 조계종과의 관계성 약화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제기되면서, 1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진제 스님과 15대 이사장 정일 스님은 조계종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담당케 됐다. 14대 이사장 진제 스님(현 조계종 종정)은 당시 이사장 소임을 맡은 후 선풍진작을 위해 발행이 중단됐던 선원지 발행을 재개하는 등 남다른 성과를 드러냈다. 특히 진제 스님은 조계종과의 관계 회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발행된 ‘선원’지에 실린 인천 보각선원장 송산 스님이 특별 기고 ‘재단법인 선학원 운영에 대한 소고’를 통해 당시 조계종과의 관계에 대한 선학원 내부 분위기가 일부 드러난다.

송산 스님은 기고에서 선학원의 설립과 기본재산이 조계종의 전신인 사찰과 승려들에 의해 이뤄졌으며, 때문에 선학원은 종교법인으로서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송산 스님은 평의회 제도의 부활 및 임원의 조계종 승려 자격에 대한 정관 반영 등을 제기하는 등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어 주목된다. 1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정일 스님도 조계종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2002년 선학원 정관에 ‘조계종 종지를 봉대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등의 극적 합의를 도출하면서 일보 진전의 기회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조계종과 선학원과의 관계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과거 혜명 스님과 송산 스님 등이 지적한 ‘종교성 잃은 재단법인’ 문제는 되려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현 법진 이사장은 재단법인의 시스템을 이용한 독단적 운영으로 선학원을 역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으며, 여직원 성추행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는 등 충격적인 행보로 선학원의 위상을 바닥으로 내몰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의 선학원을 향해 “최소한 설립조사들의 숭고한 뜻을 계승해 본래 취지에 따라 운영됐다면, 현재의 암담한 상황으로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시선이 모이는 이유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1519호 / 2020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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